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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Oct 11. 2017

하지 못한 말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는 말


초등학교 2학년 때의 미술시간이었다.

우린 조별로 모여 앉아 각자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그날의 준비물은 8절 도화지, 붓, 물감, 물통, 팔레트였다.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지만 색을 칠하는 것은 좋아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밑그림을 그릴 때 미리 물을 떠다가 마음 가는 대로 도화지에 색을 잔뜩 버무렸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조합은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틀에 박힌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을 '잘' 그리는 것보다 내겐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채워진 배경을 보는 일이 더 의미 있었다.


"나무 색이 그게 뭐냐? 그게 무슨 나무야."

내가 나무를 파란색으로 칠하자 내 짝꿍이 말했다.


"나는 파란색을 좋아해. 나무색이 꼭 갈색, 초록색 이어야 해? 그런 흔한 색은 밖에서도 실컷 볼 수 있잖아. 이건 내 그림이야. 내가 파란색을 좋아하니까 상관없어."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파란색과 하늘색을 적당히 섞어 나무를 만들었다.

나뭇잎은 분홍색으로 칠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a는 이렇게, b는 저렇게 매뉴얼대로 따라 하는 건 질색이었다.

밖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색의 나무를 볼 수 없다.

그러니 내 그림에서라도 자유롭게 칠하는 게 맞았다.


그 애는 심통이 났는지 계속 내 나무색을 가지고 짜증을 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무 두 그루와 구름을 몇 개 그려 넣었다.


"나는 살다가 나무색을 그렇게 칠하는 애는 처음 봤다."

그 애는 그렇게 얘기하더니 바로 내 뒤에 있던 아이에게 내 그림 좀 보라며 소곤댔다.

내 뒤에 있던 아이는 목소리가 큰 애였다.

그래서 순식간에 내 그림이 교실에 화제가 되었다.


"야 이지연은 나무를 파란색으로 그려."


교실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나는 화가 났다.

남자애들은 내 도화지를 들고 다니며 구경했다.


"너네 그림이나 잘 그려!"

초등학생인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다들 비슷한 그림만 그렸다.

누구 하나 독특한 그림이 없었다.

하늘은 하늘색, 나무는 갈색, 강은 파란색.

사과는 구도를 잡아서 연필로 먼저 그리고 그 위에 조심스럽게 색을 칠했다.

수학 시간에는 정확한 답이 필요하지만 미술시간은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술시간에서 만큼은 자유롭게 내 생각을 펼치고 싶었다.

틀에 박힌 하루, 틀에 박힌 시간표에 현기증이 났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오시고 다행히 분위기는 잠잠해졌다.

나는 다시 도화지를 돌려받고 새와 해를 마저 그려 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이 하나같이 내 짝꿍 곁에 모여있었다.

처음에는 내 그림 때문에 모여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내 짝꿍 때문이었다.

내 짝꿍은 준비물로 물통을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쩍쩍 갈라진 붓으로 물감을 묻혀 겨우 그림을 칠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평소에도 쉽게 말을 하는 성격으로 알게 모르게 아이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나 보았다.


애들은 빙 둘러 서서 욕을 하기 시작했다.

"너 그렇게 살지마."

"붓도 다 갈라져서 어떻게 그림을 칠하냐?"

"ㅋㅋㅋㅋ야 진짜 불쌍하다."


짝꿍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색을 칠했다.

바로 옆에서 색을 칠하고 있던 나에게 물 좀 빌려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서

잘 칠해지지 않는 붓에 억지로 힘을 줘 색을 칠하고 있었다.

붓이 말라서 물감이 잘 칠해지지 않았다.

나는 내 물통과 짝꿍을 번갈아 바라봤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서 그 애의 편이 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애가 내 그림에 대해 웃어서가 아니었다.

괜히 나까지 욕을 먹게 될까 봐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른 붓으로 그림을 칠하는 삐걱삐걱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난 다 그렸으니까 이거 쓰라는 말, 내 것 같이 쓰자는 말.

간단한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붓은 양쪽으로 심하게 갈라져 물감이 스미지도 않게 되었다.

아이는 엎드려서 울었다.

소리 내서 우는 것도 아니고 숨죽여 어깨를 들썩였다.


나는 괜히 모든 게 나 때문인 것 같아 미안했다.

내 나무 색을 가지고 웃었을 땐 얄미웠던 짝꿍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시렸다.

그때 나도 같이 웃으며 얘기할걸.

그러게 내 나무는 파란색인 게 너무 웃기지? 난 바다를 좋아해서 파란색을 좋아해.

이렇게 유하게라도 말해볼걸.

짝꿍은 그날 이후로 삼일을 결석했다.

선생님의 말로는 독감에 걸렸다고 하셨다.


짝이 오지 않은 삼일 동안 나는 그녀가 책상 위에 두고 간 붓을 화장실에서 깨끗이 씻었다.

씻는다고 다시 새 붓이 되진 않지만 그래도 모양은 얼추 맞춰졌다.

그리고 그녀 모르게 다시 제자리에 올려뒀다.


사실은 돌아오는 날 주며, 미안했다고 사과를 하고 싶었다.

나는 네 편이고 싶었다고.

그런데 부끄러웠다.

괜히 소문이 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래서 차마 하지 못했다.

끝까지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못했다.


말로 뱉어내지 못한 무게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때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해서 많이 미안해.

17년 만에 겨우 용기 내어하는 말.


내가 너의 편이 되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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