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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연 Oct 30. 2017

마음에 물을 먹이다

'괜찮다'


여행지에서 며칠 째 밖에 있었더니 미세먼지 때문인지 얼굴에 큰 뾰루지가 여러 개 생겼다.

피부과에 갔더니 덧나니까 손으로 만지지 말란다. 손을 씻고 바르라며 연고도 처방해줬다.


그래, 어떤 상처는 너무 아파 꽁꽁 싸매야 할 때가 있다.

너무 힘들었을 때 좋은 사람이라 생각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은 적이 있다.

'이건 비밀인데.' 말하는 것만으로도 저릿하게 아파왔지만 오랫동안 간직해온 이야기를 나누고 위로받고 싶었다. 그저 상대를 믿었을 뿐인데 그는 내가 진중하게 들려준 고민을 쉽고 가볍게 퍼뜨렸다.

내가 조심스럽게 내려둔 이야기가 소문을 타고 다시 내 귀에 들려온 날, 가슴이 너무 아파 펑펑 울었다.

내겐 소중한 게 상대에겐 아니었구나.

묵직했던 마음이 너무 가볍게 변해있었다.

상처가 아물기 위해선 손으로 만져선 안 되었는데 자꾸 자극이 되었다.

만지면 안 되는데, 연고라도 발라줘야 하는데 망설이던 사이 누군가를 쉽게 믿고 상처를 공유한 대가로 상처가 벌겋게 부어올랐다.

곪아 터지고 다시 고름이 생기는 것을 보면서
'아, 정말 진중한 것들은 쉽게 공유해선 안 되는구나. 소중할수록 오래 지니고 있어야 하는구나.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이 다른 이들에겐 그저 호기심일 수도 있구나.' 느꼈다.


따뜻하다 생각해서 입은 니트에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있어 오히려 바람이 더 들어오듯,

때로 우린 믿었던 사람들에게 더 쉽게 상처를 받는다.


어떤 믿음도, 어떤 관계도 오랫동안 지켜주진 못한다.

'난 믿었는데.'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다시 삼켰다.

그 믿음이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홀로 간직하고 싶었다.

그래야 비로소 내 상처에게도 조금 덜 미안 해질 테니까.

말을 아꼈다.

어떤 말이 어울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답을 알기 힘든 때가 있었다.

그러다 가뿐 호흡처럼 힘겨워져 말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춰야 할 때가 있었다.


아니라는 말도, 그렇다는 말도 아닌 더 그럴듯하고 장황한 말들로 길게 포장해 애써 '괜찮은 척' 말에 숨어버릴 때가 있었다.

장황한 이야기 속 꽁꽁 숨겨둔 내면을 애써 달래고 어루만져 물을 먹였다.

딸꾹질이 나올 때 그것을 멈추려 억지로 물을 한두 잔 마시는 것처럼,

급하고 거친 손길로 몇 잔의 물을 먹였다.

'이건 비밀이니까 티 내면 안 돼. 괜찮아 보여야해.'


마실수록 목이 메어왔지만 괜찮았다.

남들 눈에는 목을 충분히 축이는 것으로 보일 테니까.

눈에 보이는 게 뭐라고 보이지 않는 것을 경시한 채 그렇게 급급하게 버텨낼 때가 몇 번 있었다.

안쓰럽고 짠한 마음, 어떤 생각들까지도 몇 잔의 물로 달래고 어르었다.

소중한 것은 소중한 줄 알아야 한다.

오래도록 기억하고 따뜻하게 포옹해야 한다.

진심으로 끌어안아 모든 감정을 말랑말랑하게 녹여낼 수 있어야 한다.


소중한 마음은 소중하게 다뤄야 소중한 것이 되고,

어떤 비밀은 위로받고자 하는 마음과 유혹을 이겨내고 진중하게 견뎌내야만 비로소 비밀로 남는다.

나는 비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소중해서 오래 지키고 싶은 사람.

쉽게 말하기엔 진중해서 늘 조심스러운 사람.

연탄불처럼 누군가의 마음을 오래 데워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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