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말에는 무게가 담겨있다
우리 집 가훈은 '남을 나처럼 생각하자'이다.
어떤 상황에 대해 올바른 행동과 말이 헷갈릴 때는 그 사람이 나라면 어땠을지를 먼저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실로, 간단한 생각만으로도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고등학생 때의 일이다.
3학년 때 '박'씨의 성을 가진 친구가 졸업 후 '최'씨로 바뀌었다.
카톡 목록에서 사라졌다가 새로운 친구로 떴는데 등록된 성이 내가 알던 게 아니었다.
혹시 다른 사람인가 싶어 프로필 사진을 확인해보니 내가 알던 애가 맞았다.
그 무렵 다른 친구들 간의 단톡 방에서는 그 이유에 대한 토의가 시작됐다.
"걔 왜 성 바뀐 거래?"
"이름은 그대론데 성만 바뀌었어."
"아빠가 바뀐 거 아냐?"
그런데 얼마 전 그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갔던 기억이 났다.
분명 엄마가 새엄마고, 아빠는 친아빠라고 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건데 왜 성이 바뀌었데?"
"부모님 각자 재혼하셨던 거 아냐?"
"복잡하다. 되게."
그중 궁금한 것을 못 참는 친구가 제안했다.
"사다리 타기 해서 걸린 사람이 걔랑 친한 A한테 물어보고 오자."
내가 A라면, 내 친구의 상처를 쉽게 전해줄 것 같진 않았다.
반강제적으로 사다리는 시작됐고, 내가 당첨됐다.
"그걸 말해줄까? 나 같아도 말 안 할 것 같은데."
내가 그녀이거나 A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많이 화가 나고 서럽겠지.
"궁금하잖아. 너도."
"난 안 궁금해. 걔 상처가 뭐가 궁금해."
"난 궁금한데. 그럼 우리끼리 다시 한다. 너한테는 안 알려줘."
그들끼리 다시 사다리를 탔고, 누군가 물어본 모양이었다.
그날 밤, 그녀는 카톡에서 자취를 감췄다.
탈퇴를 한 건지, 번호를 바꾼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오랫동안 숨기고 싶었을 상처가 한순간 모조리 터져버린 그 감정이 너무 잘 보였다.
정말 아프고 서러웠겠다고.
그 당시 가정환경에 대한 상처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기분일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2년여 뒤 수원역 부근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내내 소식이 궁금했던 그녀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반가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오와! 반가워 잘 지냈어?"
그런데 그녀는 못 볼 것을 본 것 마냥 표정이 굳어버렸다.
"응. 잘 지내지."
얼굴이 금방 달아오르더니 갈 데가 있다고 급히 걸어갔다.
끝인사도 하지 못한 채로.
반가움에 말랑말랑해졌던 가슴이 단단하게 굳어 어느새 터질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미안했다.
때론 모른 척 지나갈 일들도 있는 법이었다.
초등학교 때 매년 신학기가 되면 가족사항을 포함한 인적사항을 기입해 제출해야 했다.
그때마다 망설이거나 손으로 가리고 적는 애들이 있었다.
그럼 몇몇 애들은 뭔데 그렇게 비밀이 많냐며 억지로 들춰냈다.
그렇게 소문은 금세 퍼졌다.
"걔네 부모님 이혼했데."
"걔 반지하에서 산데."
"걔 할머니랑만 산데."
이혼이 그 애 잘못도 아닌데, 반지하에서의 삶이 나쁜 것도 아닌데 신기하게도 죄를 지은 것처럼
부끄럽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 아이가 겪었을 상처와 심경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외부환경에 관심이 많은 경우가 많았다.
"야 우리 엄마가 그러시는데 부모가 이혼하면 자식도 이상해진데. 피해의식 때문에."
쉽게 말을 뱉었고, 쉽게 곪아버리는 가슴을 지켜보며 나는 그때마다 내가 그였다면,의 생각을 습관적으로 했다.
알고 보니까 걔네 부모님 이혼했더라, 하는 이야기들을 빅뉴스랍시고 퍼뜨리던 말들은 듣는 것만으로도 아팠다.
어떤 말들은 묵직하지 못했다.
또 어떤 것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신기하게도 우리의 성장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런 것들이 많았다.
분명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멈춰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하거나 오히려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때가 더러 있었다.
말은 가볍지만 가볍게 써서는 안 되었다.
입만 열면 소리가 새어 나오지만 그 나름의 의미를 기억해야 했다.
쉬운 것들엔 늘 책임이 따랐다.
어떤 칭찬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듣기 싫은 말이 되고,
어떤 비난은 오히려 고마운 것이 되기도 한다.
살이 빠져서 부럽다는 말은 알고 보니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던 그에게 상처가 되었다.
십 년 전, 미술 선생님으로부터 "네 그림은 형편없다."는 비난으로 인해 오히려 자극을 받고 열심히 그려 이젠 전시회도 열게 된 지인의 사례도 있다.
지인은 그때 그 선생님의 말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자기 위치를 깨닫지 못했을 거라고 아직도 고맙다고 한다.
참 신기했다.
말은 어떤 의도로 하느냐보다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가가 중요했다.
내가 듣기 좋은 말도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은 때도 있다.
향기로운 꽃도 꽃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에겐 곤혹이듯이 내 기준이 남과 다름을 알고, 내 입장에선 어떨지
상대의 입장에선 어떨지 헤아리려는 습관만이 말을 감사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말들은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었다.
말이 의미를 지니고 늘 진중한 무게를 지녔으면, 하고 소망하던 때가 있었다.
드문드문 삶의 순간마다 물감에 물들인 도화지처럼 마음에 말이 물들 때.
그래서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나 말이 삶을 내내 조종할 때.
내 몸의 기관들이 그렇게 세상을 향해 천천히 열려 작은 말소리도 또렷이 기억해낼 때.
샤워를 할 때, 밥을 먹을 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문득 떠오를 때.
잊지 않겠다고 염두한 것들은 잊힐 때가 있는데
잊고 싶은 것들은 오히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때.
신기하게도 때론 '네가 좋다'는 말보다 '네가 싫다'는 말이 더 오래 기억된다.
그때마다 나는 말을 뱉는 게 좀 더 어려웠다면, 하고 바랐다.
말을 하는 방법이 덜 쉬웠다면 힘들게 뱉을 말이기에 진중에 진중을 기할 테니까.
그럼 오래도록 남아있는 말과 기억들도 고마운 것일 때가 많을 테니까.
겨울에 핫팩을 오래도록 쥐고 있는 온기처럼 마음뿐 아니라 몸도 따뜻하게 해주는 말들을 많이 해야겠다.
좋은 말들로 사람들에게 아주 오랫동안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싶다.
한 번뿐인 만남에도 좋은 여운이 오래 남는 사람이 되고 싶다.
고맙다고, 고맙다고, 응원한다고.
어떤 말들은 반복해도 질리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에 천천히 녹아든다.
짧은 한 마디에 감정을 울리기도 한다.
내내 먹먹하게 만드는 한 마디도 있다.
어머니의 걱정,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들이 그렇다.
짧은 순간임에도 가슴을 저릿하게 하는 때가 있었다.
"수고했다. 고맙다."
"밥은 먹었니?"
별 말 아님에도 그 의도가 모두 드러나서, 괜히 찡해질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