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문4
IMF 사태 속 아버지의 실직은 우리집을 더 작고 좁게 바꿨다. 엄마가 생업전선에 나섰다. 5살이었던 나를 두고 일할 수 없어, 식당에 딸린 집으로 이사를 갔다. 공원 앞이어서 참 좋았다. ‘사골곰탕’ 간판을 달고 곰탕과 돈까스 그리고 계절메뉴로 시작했다. 동네는 ㄱ자로 세 건물 놓여 있고 가운데 주차장이 있어 백화점 푸드코트 같았다. 소금구이, 생선구이, 곰탕과 돈가스, 냉면, 백반 가게가 있어 손님이 많았다. 동네 손님도 많았고, 택시기사들도 많이 왔다. 나는 기아자동차 직원 아들에서 곰탕집 아들이 됐다. 나는 맨날 식당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부모님은 바빠지고, 싸웠다. 더 이상 사측과 싸우는 노동자는 아니었지만, 게을러질 수 있는 자기 자신과, 새벽의 준비와, 아침 차림, 점심 손님, 저녁 술상, 직원, 재료상, 고기 납품업체, 건물주, 세금 등과 협상하고 살아내야 했다. 실제로 우리집은 불법체류자를 실수로 고용했다가 노동청에 신고 당하기도 하고, 위생문제로 구청에 고발당하기도 했으며, 고기 대금 문제로 고기사업주와 소송을 하기도 하고, 건물주와도 갈등이 심했다. 장사가 안되는 건 엄청난 재앙이지만, 장사가 잘 된다고 해서 걱정이 끊이는 것도 아니었다. 부모님은 가게를 위해 계속 싸웠다. 그런 부모님을 보며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군대, 다시 대학교를 갔다가 식당에 딸린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이면 풀 냄새 나는 곳, 나의 고향! 코로나까지 버티던 ‘사골곰탕 기사식당’은 22년 폐업했다. 오래도록 살았던 나의 집, 나의 식당이 그리울 때가 있다. 지금은 이사한 부모님 집에 들를 때 바뀌어 버린 그곳을 지나가곤 한다. 어느 회사의 구내식당이 되어서 외부인은 들어가기가 어렵지만, 오늘 본 듯이 그림 그릴 수 있는 장소와 그 때 우리 가족을 생각하면 눈물겹다. 나도 누나도 부모님과 덩달아 싸웠었나 보다.
‘사장님, 김치가 정말 맛있어요!’ 택시기사들의 좋은 평가에서 시작해 별 두개 점수 댓글과 함께 문닫은 우리 가게. 맛있게 먹고 간 사람도, 실망하고 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사치품이었을 수도 있고, 부자에게는 싸구려 음식이었을 수도 있다. 모두가 누리는 가치는 다 다르다. 23년간 거의 쉬지 않고 요리하고 경영한 부모님 밑에서, 일하느라 이빨이 틀니와 임플란트로 바뀌고, 머리가 벗겨지고 하얘진 할머니 할아버지 덕분에 돈까스를 공짜로 먹으며 자란 나는 이렇게 회고한다. ‘아 그 집 돈까스 소스가 명품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