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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랍비 Sep 11. 2024

오이 향의 푸른 바다거북

그에게 처음 들은 말은 그쪽 대신 제가 해봐도 될까요?’였다.


번화가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데, 하필이면 배수구에 힐이 끼어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워낙 좁은 길이라 바닥에서 낑낑거리고 있으면 사람들이 불편한 눈치를 주며 지나간다. 게다가 한껏 멋을 부린다고 짧은 치마를 입고 나온 터라, 쪼그리고 앉은 나도 남의 시선이 불편했다.

    

그때 가 다가왔다.


밖에 나가본 적 없을 법한 새하얀 피부에 적당히 기른 곱슬머리가 살랑거렸으며, 투명한 안경 너머로 커다랗고 수더분해 보이는 눈매가 보였다. 대충 걸쳐 입은 난방과 삼선 슬리퍼, 그리고 천으로 만든 에코백을 장바구니로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집에 있다가 급히 장을 보러 나온 모양이었다.

 

“그쪽 대신 제가 해봐도 될까요?”

“아, 아니. 이게요. 하아….”


정말 짜증 나는 하루였다. 내가 그렇게 답답해 보였을까. 그는 장바구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도 아니고 ‘괜찮아요.’다.  

   

“네?”

“우선 이거. 안 덥죠?”


그는 나에게 대충 걸친 줄무늬 난방을 내 무릎에 덮어주었다. 그러자 펄럭하며 높고 푸른 하늘에서 커다랗고 넓은 난방이 선녀의 날개옷처럼 내려온다. 그리고 날개옷이 무릎에 덮이자 선한 눈매의 그가 보인다.


그는 오이 향이었다.


시원‧상쾌한 향은 난방이 덮임과 함께 내 후각을 자극했다. 그리고 태어나 처음으로 오이 향이 좋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나는 태생적으로 ‘오이 혐오자’다. 어릴 적 엄마가 김밥을 싸줄 때면 항상 오이를 빼고 먹었다. 그때는 이 쓰고 비린 걸 도대체 왜 먹는지 몰랐는데, 나중에 커서 알게 된 사실은 오이를 특별히 못 먹는 사람은 DNA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인간의 몸에는 쓴맛을 감지하는 TAS2R38이라는 유전자가 있는데, 이 유전자는 2개의 타입이 있다고 했다. 바로 ‘PAV 타입’과 ‘AVI 타입’이다. 그중 PAV 타입은 AVI 타입보다 쓴맛을 더 강하게 느낀다고 하는데, 그게 바로 나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그는 시원하게 느껴졌다.

 

아무튼 이런 유전자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원하고 좋은 냄새가 났다.


“이거 해도 괜찮나요?”


그가 난방으로 훤한 내 무릎을 덮어주고 장바구니에서 식용유를 꺼내며 말했다. 당시 나는 오이 향에 정신을 못 차리던 터라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새로 산 식용유의 뚜껑을 따며 힐이 낀 배수구 부분에 살살 뿌리기 시작했다. 이어 그가 힐을 살살 비틀자, 그렇게나 꽉 끼었던 힐이 쏙 빠졌다.


“여기요.”

“감사합니다.”

“그럼 전….”


그는 천으로 된 장바구니를 번쩍 들어 어깨에 멨다. 그러자 그 가방에 그려진 커다란 바다거북이 보였다. 까만 눈에 매끈하게 빠진 유선형 머리와 단단한 등갑, 그리고 에메랄드빛 바다를 물갈퀴로 비행하듯 헤엄치며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닮아 보였다. 날카로워 보이면서도 순둥순둥한 눈매, 자연스레 올라가는 입꼬리. 이제부터 그는 나에게 바다거북이다.


“바다거북이네요.”

“네? 아, 네.”

“눈이 예뻐요.”

“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보며 눈이 예쁘다고 말해버렸다. 안경 뒤에 숨은 크고 맑은 동공에 강아지처럼 아래로 착 말린 눈을 보고 있자니, 혼잣말이 저절로 나와 버린 것이다. 그렇게 크게 혼잣말을 해놓고 당황해 버린 나는 그에게 난방을 돌려주며 말을 얼버무렸다.     


“그 거북이요. 거북이 눈이 까맣고 동그란 게….”

“아, 거북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네….”

“그러면 이거 가질래요? 푸른 바다거북이예요.”   

  

그가 장바구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곧 나에게 똑같은 에코백을 주었다.

     

“그럼, 고생하세요.”

    

그는 그렇게 나에게 오이 향과 푸른 바다거북만 남기고 훌쩍 떠나버렸다. 나는 친구들을 만나 왁자지껄 떠들고 술을 마시며 그간 지냈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도, 뭔가에 홀린 듯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친한 친구인 지현이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봤다.    

 

“뭐야? 뭐 안 좋은 일 있어?”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닌 거 같은데? 너 지금 정신이 나가 있잖아. 우리랑 이야기해도 계속 딴소리하고, 혹시 큰일은 아니지?”     

나는 지현이의 물음에 조금 뜸을 들였다. 그러다 결국 친구들에게 말해버렸다.


“오이 향의 푸른 바다거북을 만났어.”


그러자 친구들은 모두 눈만 껌벅이며 나를 미친년처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옷차림과 어울리지 않은 푸른 바다거북의 에코백을 발견한 지현이가 피식 웃었다.


“얘 또 시작이네. 또 빠졌어. 이번에도 직진?”


지현이는 나를 너무 잘 안다.


“응.”

“너 정말 무섭다. 이번에는 집착 좀 줄여.”

“네가 뭘? 나 정도면 그래도 양반 아니야?”

“어, 아니야. 전화 안 받는다고 야밤에 스물두 번이나 전화하던 게 양반이니?”

“그건. 화나서 그런 거고.”

“그래. 또 그렇다고 너무 빠지진 말고.”

    

지현이는 자기 객관화는 안 돼도 남 객관화는 정말 잘한다.

    

“야, 또 내가 뭘….”

“샤이니, 세븐틴, 원피스, 한화이글스 유니폼, 블리치, 마그넷, 닌텐도 게임들. 네가 그간 광적으로 수집했던 모든 것들. 그리고 전 남친의 모든 것.”

“응. 내가 잘못했네.”     






그렇게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문득 그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그를 만날 수 있을까, 셀 수도 없이 많은 생각을 해봤다. 작은 에코백을 장바구니처럼 쓰고 있는 걸 보니 혼자 살겠지? 반지도 없었는데, 설마 여자 친구가 있을까? 있다면 멸망한 세계에서 혼자 터널 속에 덩그러니 남은 느낌 같을 것이다.


문득 이름도 모르는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애써 무시하며 그가 다닐법한 거리를 서성였다. 하지만 시간대가 맞지 않는 건지 도통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를 만났던 지점으로부터 장을 볼만한 마트며 편의점을 한없이 서성인 적이 있다.


그는 곱슬머리를 예쁘게 길렀으니, 혹시 헤어 디자이너가 아닐까 싶어서 동네 미용실에 한 번씩 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애꿎은 앞머리만 자르고 나왔다. 그렇게 한동안 나는 오이 향의 푸른 바다거북에게 푹 빠져 미친 사람처럼 그를 찾았다.


오죽하면 인터넷에 수십 번 푸른 바다거북을 검색해 봤을까. 그러다 보니 이 동물이 멸종위기종인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다른 멸종위기종은 또 뭐가 있을까 하며 검색해 보는데, 우리나라 토종 돌고래인 ‘상괭이’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또 ‘웃는 고래 상괭이’에 대해 웹 서핑을 했다. 상괭이는 주둥이가 없고 짧고 둥그스름한 머리로 제법 귀염 상이다.



아, 귀여운 동물을 보며 그리고 있자니 또 그가 보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아무런 생각 없이 웹 서핑을 하는 도중 놀랍게도 푸른 바다거북을 발견했다. 진짜 푸른 바다거북이 아닌, ‘오이 향을 풍기는 부른 바다거북이’인 그다. 그가 ‘00시 상괭이 실태조사’라는 팻말을 들고 서 있는 사진이 화면을 통해 보인다.


혹시 그는 환경운동가일까? 인터넷에 ‘상괭이 실태조사 위원’에 대해 검색하기도 하고 ‘해양 멸종위기동물 보호 단체’에 대해 검색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그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귀여운 상괭이 티셔츠나 사고 노트북을 덮었다. 동그란 눈에 앙다문 입으로 미소 짓고 있는 상괭이를 보자면 그가 생각났기에, 도저히 충동적 구매 욕구를 참을 수 없었다. 부적을 사고 간절히 기원하는 사람처럼 나도 모르게 저절로 상괭이 티셔츠를 사고 간절히 기도했다.


부디,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며칠이 지나도 그를 볼 수 없었다. 거의 포기한 거나 다름없을 정도로 그를 찾아다니던 시간이 줄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는 그를 찾아다니지 않았다. 나는 순간의 두근거림으로 몇 날 며칠을 같은 장소에서 망부석처럼 기다리는 ‘정절’의 아이콘은 아니다. 막상 이유와 목적을 잃은 두근거림은 얼마 가지 못했고, 나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 내 삶을 살아갔다. 그렇게 평범하게 장을 보던 그때, 오이 향이 내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어?”


사실 그의 얼굴이 정확히 어땠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무렵,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오이 향만은 익숙했다. 그렇기에 나도 모르게 뒤 돌아 무작정 오이 향을 추적했다.


‘어디지? 누구야?’


후각이 금방 피로해져서 오이 향도 어느새 무뎌졌다. 더는 나지 않는 오이 향을 뒤로하고 이젠 시각에 의존하여 그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곱슬머리를 시원하게 넘긴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는 푸른 바다거북이 그려진 에코백을 들고 달걀 코너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아, 다! 오이 향푸른 바다거북!’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내 눈보다 한참 위에 있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요.”

“네?”


정말 ‘오이 향의 푸른 바다거북’이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수더분한 눈매에 초롱초롱한 눈망울, 그리고 그새 자라서 시원하게 넘긴 곱슬곱슬한 머리. 그가 나를 보면서 환하게 웃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나의 후줄근한 모습이 떠올랐다.


어제 입었던 상괭이 티셔츠에 실밥이 터져 늘어난 반바지와 크록스 신발. 그나마 선크림은 발랐지만,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훤한 민낯. 그리고 그가 나에게 주었던 때 묻은 푸른 거북이 에코백. 그게 내 모습이었다.


‘아, 망했다. 모자라도 쓰고 올 걸.’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해양 생물을 좋아하시나 봐요.”

“어…네. 푸른 바다거북이랑 상괭이를 좋아해요.”

“그런 것 같아 보여요.”

“시간 괜찮으면 커피 한잔할래요?”

“네?”

    

그는 주춤주춤 했다. 설마 여자 친구가 있는 걸까?

     

“아! 여자 친구 있으면 말고요. 애인 있는 사람이랑 데이트는 별로라.”

“아, 아니에요. 없어요.”

“그럼, 전화번호 알려줘요.”

    

그렇게 우리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나는 그렇게 한 우물만 파는 현대 여인의 곧은 절개를 지키며 ‘오이 향의 푸른 바다거북’을 찾아냈고, 나는 그만의 상괭이가 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받은 에코백은 그가 직접 그린 거라고 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딱 두 개밖에 없단다. 원래는 에코백을 만들어 팔아 푸른 바다거북과 상괭이 보호 단체에 기부하려고 했었단다.

     

아무튼 그는 에코백으로 나를 단번에 알아보았고, 나의 저돌적인 돌진에 그저 부끄러웠을 뿐이라고 했다. 그는 내 예상대로 늘 차분하고 다정하며 수더분한 눈빛으로 나만 바라봐주었다. 그렇게 나는 예상한 성격 그대로였던 그와 곧 연애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난 언제인가 그는 나에게 무릎을 꿇고 반지를 내밀었다.

     

“저, 저…. 나, 나랑…. 후, 나랑 결혼해 줄래?”

“나랑 결혼하면 바빠서 상괭이랑 푸른 바다거북은 못 보러 갈지도 몰라. 괜찮아?”

“그래도 좋아.”

“평범한 직장에 평범한 가정, 평범한 남편과 아빠가 되어야 할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응. 좋아.”

“그러면 나도 좋아.”

“근데, 혹시 신혼여행에서만이라도 바다거북을 보러 가면 안 될까?”

     

나는 그의 소심한 자기주장에 그저 웃었고, 그는 눈시울이 붉어져 반짝이는 눈으로 나에게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듬해 ‘오이 향의 푸른 바다거북’과 결혼했다. 그와 동시에 ‘내 오이 향의 푸른 바다거북’은 점차 생기를 잃어 갔다.


         



      

그때는 왜 몰랐을까. 결혼이란,

 

아니. 사랑이란 결국 서로를 날카롭게 찌르며 죽이고 죽이다가,

결국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게 곧 일상이란 것을 깨닫게 한다.

  

그냥 우린 사랑한다는 이유로 그런 게임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에게 맞추라며 나를 날카롭게 찔렀고, 나 또한 그를 차갑게 찔렀다. 분명 그 시작은 사소했다. 그냥 넘어가려면 넘어갈 수 있는 것이었지만, 사소함이 지속되면서 내 불만은 커졌으면 커졌지 결코 사소해지지 않았다.   

  


나는 식탁에 먼지 떨어지는 걸 참지 못한다. 

“내가 식탁 위에 택배 상자 놓지 말라고 했지.”
“그거 좀 그럴 수도 있지. 나 요즘 허리 아파서 그랬어.”
“택배 상자가 얼마나 더러운데 식탁 위에서 풀어? 차라리 소파에 앉아서 테이블 위에서 하면 되잖아.”
“닦으면 되잖아, 내가.”


  

그는 물건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     

“이거 안 쓸 거야? 정리 좀 해주면 안 될까?”
“그거 이따가 다시 쓸 거였어.”
“저번에도 그 얘기했잖아. 그런데 결국 그 자리였고.”
“아니, 이번엔 진짜 쓸 거였다니까?”
“그니까. 그때도 그 말했는데.”
“치울게. 치우면 되잖아!”
“후우, 치워줘서 고마워.”
“어.”     



나는 연락이 잘 안 되는 걸 참지 않는다.     

“왜 이제 와?”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철이 형님 차가 고장 나서.”
“그럼 오늘도 말해야지.”
“아니, 저번에 철이 형님이랑 근무하는 날이면 40분 정도 늦는다고 했잖아.”
“40분? 1시간 늦었는데? 그래서 20분은 뭐 해서 연락이 안 되는데?”
“주차 자리가 없어서 좀 왔다 갔다 했어. 그만하자.”
“20분간? 지금 철이 씨한테 전화해도 돼?”
“왜 그래! 좀! 지금 새벽 5시야! 나 좀 믿어주면 안 되는 거야?”
“연락 잘하기로 했었잖아!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
“그게 걱정이니? 알겠어. 미안해. 앞으로 연락 잘할게. 철이 형님한테 전화해 봐. 하…”          



그는 쉬는 날에 혼자 있는 걸 좋아한다.     

“오늘 나가자.”
“나 이 책만 다 보고 가자.”
“몇 분 걸리는데?”
“두세 시간 정도.”
“싫어. 나가자.”
“나 이번 달에 책 한 권을 못 읽었어. 이것만 볼게.”
“안 돼. 나랑 나가자.”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냥 혼자 다녀오면 되잖아. 사람을 왜 이렇게 못살게 굴어? 원래 이런 사람이야?”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지만, 현재까지 가장 젊고 예쁜 나는 딱 오늘까지만 있잖아.”
“후…. 그래. 알겠어.”     



그렇게 수더분했던 내 푸른 바다거북은 어디로 갔는지, 그는 날카롭게 날 선 상어처럼 나를 물어뜯었다. 우린 그렇게 서로를 물어뜯다가 지쳐 곧 서서히 자신을 죽여갔다. 우린 그물망에 걸려 죽어간다는 걸 알고 있는 바다거북처럼, 매가리 없는 스스로를 죽이고 또 죽였다. 원래 사랑이란, 그리고 결혼이란 그런 게임이다.

    

푸른 바다거북이 가장 먼저 죽인 건 바로 오이 향이다. 그는 나와 결혼하고 나서 오이 냄새를 벗었다. 푸른 바다거북이 지금껏 오이 냄새를 풍겼던 이유는 단 하나다.


오이 비누가 제일 싸서.


그가 인터넷에서 가장 싼 군용 오이 비누를 한 박스씩 사다 그걸 즐겨 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샴푸나 바디워시 등의 샤워용품 대신 모두 오이 비누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오이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없지. 하지만 나와 같이 사는 신혼집에는 오이 비누가 필요 없었다. 내가 쓰던 질 좋은 클렌징폼과 바디워시, 그리고 샴푸와 린스가 있으니 절약을 위한 오이 비누 따윈 다시 낭비로 변할 뿐이다. 그렇게 그는 서서히 오이 냄새를 잃어 갔다. 그는 가끔 나에게 연애할 적 썼던 오이 비누에 대해 말하곤 한다.


“오랜만에 오이 비누나 사 볼까?”

“됐어. 안 좋은 걸 뭐 하러 써. 그리고 집에 다 있잖아.”

“그래도. 당신이 좋아했잖아.”

“나 오이 못 먹잖아. 냄새 싫어.”

“그래. 맞아. 돈 아깝긴 하다.”


또한, 내 푸른 바다거북은 자기 자신도 죽였다.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항상 빼놓고 사는 사람 같았다. 그는 나와 결혼하고 안정적인 벌이를 위해 물류 회사에 취직했다. 그의 일을 설명하자면 물류센터에서 재고관리를 하며 출하하는 것으로 벌이는 꽤 좋았다. 하지만 그는 그 외의 것들로 많이 힘들어했다. 고된 노동과 불규칙한 노동시간, 억센 남자들 사이에서 생존해야 하는 인간관계 등, 모든 것이 그와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해외 바다에 가볼래?”

“갑자기?”

“응. 아니, 신혼여행도 코로나 때문에 강원도로 다녀왔잖아.”

“바다는 지겨워. 이번에는 가까운 도시로 다녀오자. 그리고 우리 돈도 모아야지.”

“그건 그래.”


그렇게 맑았던 그의 두 눈은 점차 혼탁하게 변해갔다. 물론 우리 사이가 안 좋았던 건 아니다. 같이 깔깔거리며 웃긴 티브이 프로그램도 보고 가끔은 시원한 바람을 쐬러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갈망하는 무언가가 채워지지 않은 눈빛이었다. 결핍의 시간이 길어진 그는 결국 나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나… 푸른 바다거북이 보고 싶어.”


그놈의 푸른 바다거북….


“저번에 아쿠아리움 가서 보고 왔잖아.”

“갇혀 있는 아이들 말고, 진짜 푸른 바다거북을 보고 싶어.”

“도대체 그 차이가 뭔데?”

“나도 몰라. 그런데 보고 오면 좀 달라질 거 같아.”

“그럼 어디서 볼 수 있는데?”

“하와이. 동남아시아. 아열대 바다에서.”

“비행기는 안 돼. 돈도 돈인데 사실…”

“왜! 그간 일도 열심히 하고 잘 살았잖아, 우리. 응? 한 번만 보고 오자. 내가 진짜 잘할게.”


중대한 말을 하려 하는데, 그가 내 말을 도중에 끊어버렸다. 그간 보여준 적 없는 행동이다. 뭐가 그를 그렇게 폭발하게 만드는 걸까? 설마 나 때문에? 지금 나와 만난 걸 후회하는 건가?


그의 말에 기분이 지옥 아래까지 추락한다.


“말 꺼내서 그런데, 혹시 거기 가면 물류 일은 어떻게 하려고? 그만두려고? 거기 일주일 이상 휴가 준 적이 있어? 그냥 직장 잘리는 거잖아.”

“다른 일을 알아보지. 아직 젊잖아, 나. 에코백이라도 다시 만들면…”

“안 돼.”


나는 그의 제안을 단번에 거절했다. 그러자 그는 나와 언쟁이 잦아졌고 이윽고 침묵의 기간이 다가왔다. 그는 언성 높이거나 남이 기분 상할 말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그렇기에 나와 크게 다툴 것 같으면 일절 침묵으로 답했다. 그의 눈은 침묵과 함께 서서히 죽어갔다.

 

그런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를 만나기 전 사람도 나와 만나는 것이 지쳐 서서히 그렇게 죽어갔다. 그리고 자기 생기를 찾기 위해 날 떠났다. 그 사람은 나에게 이젠 지쳤다고,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제발 헤어져 달라고, 부탁한다고 애절하게 이별을 고했다.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난 차마 매달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마음이 여려도 한참 여린 그는 텅 빈 동공이긴 해도 나를 마주했다. 또한 분노로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손이 나를 꼭 잡아주었다. 그래도 그가 버틸 수 있을까? 차라리 나한테 소리 한번 시원하게 지르지. 마음 여린 그가 한심하고 답답했던 나는 결국 그에게 감추고 있던 비밀을 밝히기로 했다.

     

어느 날 머리에 까치집 있는 줄도 모르고 아침밥을 먹는 그가 보였다.

     

그는 아침밥은 꼬박꼬박 먹는다. 그렇기에 밑반찬과 쌀밥은 미리 해놓은 뒤, 그가 자는 시간에 밥상을 차려놓는다. 그리고 먼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덮개를 씌워놓는다. 전날 새벽까지 일한 남편은 알람 소리에 송장처럼 일어난다. 이후 일어나자마자, 내가 출근하려는 것도 모르고 비몽사몽으로 밥을 먹는다. 이에 출근하려던 나는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자, 이거.”     


나는 검은색 배경의 사진 한 장을 그에게 날리듯 던졌다.   

  

“그게 뭔데?”     


그는 대충 눈으로 흘기다가 벌떡 일어나 사진을 뚫어져라 본다.     


“혹시…. 이거 정말이야?”

“응.”

“왜 말 안 했어? 병원은 왜 혼자 갔어.”

“말할 타이밍이 안 맞아서.”     


그가 들고 있는 건 내 뱃속에서 살아 숨 쉬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이다. 그는 가슴속에 무언가 차오르는지, 눈시울이 붉어지며 손을 떨었다.     


“그럼, 언제 말하려고 했는데?”

“저번에 거북이 보러 가자고, 비행기 타자고 할 때.”

“미안해.”     


그는 혼탁한 눈을 껌벅이며 나를 꼭 안고 사과했다. 그러자 나는 괜히 머쓱해졌다.     


“뭐가, 뭐가 미안해.”     


난데없는 그의 울음에 나도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냥 다. 철없는 내가 너무 미안해. 하필 거북이 생각이 그때 나서.”

“아니야. 내가 너무 차갑게 굴어서 미안해.”

“고마워.”

“그래. 나도.”     


그날로 그는 푸른 바다거북도 잊었다. 그렇게 그는 완전히 죽었다.

그는 나와 딸아이 옆에 남기로 했다.   


       

   



     

우리는 두 손을 잡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서로를 죽이다 못해 자기를 죽여 가며. 그렇게 길고 길었던 결혼 중후반에 이르러, 어리게만 보이던 우리 딸아이를 시집보냈다. 남편은 결혼식장에서 아이의 손을 떠나보내며 펑펑 울었고, 나는 그의 어깨를 다독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아이를 보내고 나니, 나는 문득 동심과 같은 순수한 남편의 마음이 생각났다.

    

손수 에코백을 만들어 팔며 푸른 바다거북을 보호하기 앞장섰던 남편은 나를 만나 자기 자신을 죽여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나도 남편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거의 죽였다. 직장에 다니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으며, 그중 십여 년 동안 다닌 직장은 출산으로 그만두었다. 이렇듯 결혼이란 패배와 죽음밖에 없는, 그런 처절한 문화충돌이다.

     

그런데 꼭 그렇게 상대를 죽이고 자신을 죽여야만 살 수 있었을까. 고통 주던 날붙이 같은 말과 상처, 그리고 그에 따른 흉터. 그런 것 없이 서로 잘살아볼 수는 없었을까. 문득 드는 생각에 남편이 불쌍해졌다. 그렇기에 나는 용기 내어 눈시울이 붉어진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여보. 우리 결혼식 끝나면 하와이나 갈까?”

“난데없이 하와이는 갑자기 왜? 우리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신혼여행은 쟤들이 다녀와야지.”

“그냥. 푸른 바다거북이 보고 싶어서.”

     

이젠 나도 그리고 남편도 서로 살고 싶다. 그렇기에 훌훌 털어버리며 하와이에 가서 바다거북이나 볼까 했다. 그러자 남편이 눈물을 닦으며 내 손을 잡았다.

     

“뭐 하러. 내 푸른 바다거북이 여기 있잖아. 저기에는 하얀 드레스 입은 내 상괭이도 있고.”

     

그에겐 이전 시절의 맑은 눈은 없고 혼탁한 동공만 있다. 거기에 찰랑찰랑한 곱슬머리는 어느덧 휑하니 밀려 그 모습을 보기도 어렵다. 그래. 그는 여전히 오이 향을 잃었고, 생기마저 모조리 죽여 없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이 말한다.

     

죽는 게 곧 사는 거야.

     

그의 말을 들으니 이제야 확신이 찬다. 아, 그래. 이걸 확인해 보고 싶었어.

    

“난 여전히 오이가 싫어.”

“응. 알아.”  

   

하지만 내 남편이 좋았던 거야.

 

아, 내 오이 향의 푸른 바다거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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