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기다려야지! 내가 금방 나온다고 했잖아! 응? 걱정했잖아. 갑자기…. 경찰서에서 전화 오고.”
아내가 울먹울먹 하자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내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잃어버린 내 지갑과 휴대폰을 가져와 내 신원을 보증‧확인했다.
그러고는 경찰서에 연신 허리를 굽히며 사과했다.
뭐, 나도 미안하다고는 했다.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분명히 납치였는데. 다급한 여자의 표정이었는데.
그래도 아내가 아니라니 정말 다행이다.
이에 나는 파출소를 나오며 아내에게 사과했다.
“여보. 나 잘못 본 거 아니야.”
“아직도 그래? 응?”
“아, 아니. 미안해요.”
“됐어요. 그러니까 미안할 짓을 왜 해. 내가 데려다줄게. 그리고 내가 데리러 올게.”
“알겠어요.”
참나, 요즘 가장의 무게는 어디로 갔는지. 도통 날 존경하지 않는다.
이런 말 해봤자 또 젠더 교육이니 양성평등이니 하며 날 가르치려 들 게 뻔하다.
그냥 참자.
아내는 학교에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러자 당직 기사가 나를 반기는 눈치였다.
“교장 선생님 오셨어요? 괜찮으시죠?”
“아, 그렇죠. 뭐, 대단한 일이 아니었으니 다행이죠.”
“들어가시죠.”
아침부터 한바탕 하고 와서인지, 교무실이 굉장히 어수선했다.
다른 선생님들의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내 귀를 파고든다.
우리 학교는 혁신학교로 교무실이 따로 없다.
교장실을 만들어 뭐 하는가.
그 교실 하나 더 넓혀서 학생들을 위해 쓰는 게 훨씬 낫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권위를 내려놓고 존경을 받았다.
“김 선생님 안녕하세요.”
“아, 교장 선생님 오셨어요?”
“그 폭력 사건은 어때요?”
“네? 아, 그 사건이요? 잘 해결되었습니다.”
“벌써요?”
“네네. 일은 잘 보고 오셨어요?”
다행이다. 아침부터 급하게 서둘렀는데 일이 잘 마무리되었다니, 그저 안도의 한숨만 나온다.
“예. 뭐, 일은 잘 봤습니다. 아! 내 신문은?”
김 선생은 내 신문을 아침마다 꼬박꼬박 챙겨주는 역할을 가졌다.
나름 그도 나를 신경 쓰며 내 라인을 타고 싶은 것 같은 얼굴을 내비친다.
그래봤자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김 선생의 노력은 가상하다만, 이제 교장이 밀어준다고 높이 올라가는 그런 세상은 지났다.
“아, 신문! 여기 있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신문을 넓게 펼쳤다.
이세돌이 AI인 ‘알파고’를 한 번 이겼다는데, 정말 대단하다.
아니, 4승을 알파고가 했으니, AI 기술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이세돌이 한 판밖에 못 이기다니, 요즘은 아이들에게도 AI 교육을 해야 하는 시대에요. 그렇죠?”
그러자 김 선생은 내 눈치를 슬쩍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 그럼요. 그런데 요즘은 하도 챗GPT를 많이 사용해서 또 문제더랍니다.”
“챗GPT요?”
“예. 컴퓨터에 요구사항을 적으면 뭐든지 다 해준다네요.”
“허허, 고것 참. 신기한 세상에 살아가고 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참, 김 선생님. 오늘 온 공문은 없나?”
“아, 제가 다 처리해 놨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죠.”
나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안쓰럽지만, 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김 선생이다.
그렇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초에 물을 뿌려주기 시작했다.
모름지기 교장이란 다른 교사들을 믿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기다려줘야 한다.
그래서 교장실에 풀들이 그렇게 많은 것이다.
화초들을 관리하고 있자면 시간이 금방 가고, 그 시간 동안 부장 교사들이 알아서 일을 잘하기 때문이다.
교장은 그들의 일에 책임감을 가짐과 동시에 신뢰하는 수밖에 없다.
세세하게 따지고 들면 서로만 피곤해진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래. 참자. 참아.’
일과를 모두 마치고 아내와 같이 퇴근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아내가 마중 나와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어?”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내가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아, 그랬나?”
그렇게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와 우리 집 지하 주차장까지 차로 겨우 5분 거리다.
왜 이 짧은 거리를 차로 왔다 갔다 하는지. 참, 알 수 없다.
“다음에는 걸어 다니자.”
“이 더위에 어떻게 걸어?”
요즘 사람들 참 인내심이 부족하다.
더위도 참고 견디며 살아가는 거지.
젊은이들은 에어컨 없이 여름을 살아가지 못한다. 쯧쯔.
에어컨이란 자고로 열대야가 시작되면 그때서나 트는 거지, 요즘 사람들은 그래서 문제다.
“쯧, 다음부터는 좀 걸어 다니지?”
“아이고. 네네. 알겠습니다. 교장 선생님.”
아까 화난 건 다 풀렸는지 이제는 또 굽신굽신 하면서 내 비위를 맞춘다.
이렇게 능청스러웠던 적이 한 번도 없는데, 갑작스레 이런 모습을 보여주니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참, 알다가도 모를 사람.
그래도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렇게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하고 소파에 앉았다.
그러자 아내가 물컵과 약봉지를 가져온다.
“나 아까 혈압약 먹었는데?”
나는 분명히 식사 후 바로 혈압약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앞선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 정말? 아닌데? 여기 약봉지에 날짜 그대로 적혀있잖아. 8월 2일 저녁.”
“오늘이 8월 2일인가?”
“응.”
“어제 먹었던 기억을 오늘로 착각한 건가?”
“그런가 보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그녀가 주는 약을 먹고 나니 금세 졸음이 쏟아진다.
오늘 하루가 피곤했나?
눈이 스르르 감기는데, 아내가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든다.
“자나?”
‘안 잔다!’라고 놀라게 해 주고 싶은데 눈꺼풀이 무겁게 쏟아져 내린다.
“여보 잔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아들이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버지?”
그러자 아들내미가 나와 나를 번쩍 안아 올린다.
어이쿠 이놈 다 컸네.
언제 이렇게 힘이 좋아졌지?
두 사람은 나를 침대에 누이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나갔다.
그렇게 잠자던 중, 알 수 없는 인기척이 들려온다.
뭐지? 누구야?
아내인가? 이제야 자러 들어오는 건가?
그자는 아내가 아닌 거 같다.
아내라면 내 옆으로 들어와 누울 텐데, 그자는 내 옆에 서서 우두커니 나를 지켜보는 느낌이다.
공포로 인함인지 내 몸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는다.
설마 가위가 눌린 건가?
가끔 피곤하면 가위가 눌리는데, 하필 그때가 바로 지금인가 보다.
가위로 인한 환영이 갑자기 내 팔에 날카로운 무언가를 꽂는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러자 그 환영은 내 얼굴을 살피기 시작한다.
내 눈앞에 손을 흔들며 그가 말한다.
“어? 일어났어?”
나는 그 목소리를 듣고 힘없이 눈을 떴다.
“여보?”
말도 안 돼.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아내는 주사기를 뽑고 황급히 나간다.
가위가 이렇게 구체적인 인물로 형상화된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하지만 궁금증에도 불구하고 다시 눈꺼풀에 아령이라도 얹어놓은 듯, 잠이 무겁게 쏟아진다.
아, 도무지 안 되겠다.
우선 자고 일어나 보자.
자고 일어나 보면 무언가는…….
여타 다른 아침과 똑같은 알람 소리가 나를 깨운다.
“헉!”
악몽을 꾼 것처럼 등에 식은땀이 가득하다.
방문 밖으로 들려오는 아내의 도마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오는 걸 보니 개꿈이었나 싶다.
그럼 그럴 리가 없지.
아내가 왜 바늘을 꽂겠어, 나한테.
이 늙은 몸뚱어리에 뭐 볼 게 있다고.
“어? 근데 이거 뭐야?”
왼쪽 어깨 부근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다.
평소에 잘 보지 않는 부위인지라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하지만 스치듯 유리창에 비추는 내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갔다.
빨간 점 하나와 붉게 올라온 어깨.
분명 주사 자국이다.
만져보면 살짝 욱신거리는 것이, 주사 자국으로 확신할 수 있다.
이에 급하게 나가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내는 천연덕스럽게 나를 물끄러미 보며 말했다.
“일어났어요? 앉아요.”
평소와 똑같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하다.
보통이라면 그냥 넘겼을 법한 어색한 균열이 의심이라는 열쇠로 하나둘씩 열리기 시작한다.
그녀의 표정, 말투, 손짓 등 모두 다 약간의 긴장감을 조성하고 있다.
왜? 나 때문에? 나를 보고 왜 긴장하는 거지?
꼭 영화 ‘트루먼 쇼’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아침밥 안 먹고 뭐 해요?”
“어, 응. 먹어야지.”
어정쩡한 미소와 미세하게 떨리는 말투, 그 속에 숨어있는 살얼음 같은 두려움.
그 속에 그녀가 나에게 갓 지은 따뜻한 밥공기를 준다.
그런데 그 손에 특이점이 있다.
분명히 내 아내는 왼쪽 손목 가운데 큰 점이 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손은 깨끗하다.
도대체 누구야, 당신.
내 아내는 어디로 갔어?
분명 내 아내는 납치된 게 틀림없다.
뭐지? 누가? 왜?
그 조폭이라던 학부모? 그렇다면 주사는 왜 놓은 거지?
내 아내랑 이렇게 똑 닮은 사람은 어떻게 찾은 거야?
밥술을 뜨며 수많은 질문이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성급하게 행동해선 안 될 거란 느낌이 들었다.
그렇기에 평소와 같이 평범하게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학교에 출근하여 조용히 생각을 해봤다.
“이상해. 이상해.”
내 혼잣말을 듣고 김 선생이 다가온다.
“교장 선생님, 무슨 일 있으셔요?”
“아니, 아닙니다.”
“왜요?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말해도 될까?
괜히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는 거 아니겠지?
나는 어떻게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말해버렸다.
“아내가, 내 아내가 아닌 거 같아.”
“예?”
“아들놈도 수상해. 갑자기 힘이 너무 세졌어.”
“에이. 착각이시겠죠.”
“아니라니까. 나한테 이상한 약 먹이고 주사까지 놨다니까?”
“선생님이 아프셔서 그런 거 아니겠어요?”
“하. 거참, 아니라니까, 그러네. 답답하게. 혹시 저번에 학폭 가해했던 학생 학부모 관련 서류 좀 가지고 와봐요. 그 학부모가 수상해. 정부 고위직이라는 소리도 있어.”
“예?”
평소 빠릿빠릿하던 김 선생이 갑자기 뜸을 들인다.
“아, 김 선생. 왜 이래요? 정말.”
“아니,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선생님, 조금 진정하시죠.”
“아! 진짜! 왜 이러나 이 사람아! 어? 내가 다 알고 있다니까?”
“저, 선생님 진정 좀….”
나는 끝내 참고 있던 화를 터트려버렸다.
지금 당장 아내를 구해야 하는데, 이 멍청한 사람들 때문에 내가 먼저 답답해 죽겠다.
“야! 김산문! 너 왜 그래 정말? 어!”
“저 선생님?”
김 선생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내가 교장이고 그쪽은 내 아래 직원인데, 교장이 서류 좀 보는 것이 월권인가?
“왜!”
“우선 저는 김 씨가 아니고요.”
“뭐?”
갑자기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잔뜩 긴장한 눈치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이 사람들아. 뭐 해? 구경 났어? 빨리들 가서 수업 안 해요? 어?”
그러자 김 선생이 나를 보며 애처롭게 웃었다.
“선생님. 저희가 수업할 리 없잖아요. 예?”
“뭐?”
“우선 저기 가서 앉으세요.”
“어딜 가?”
“그, 저 뭐냐. 교장실. 그래요. 교장실 가시죠. 가서 앉아 계시면 제가 따듯한 차 타드릴게요.”
나를 애처럼 무시하며 달래는 김 선생을 보니 나도 모르게 화딱지가 났다.
그래서인지 내 손을 주체하지 못하고 휘둘러버렸다.
‘짝!’
정신을 차리니 김 선생은 뺨을 감싸고 있고 나는 이미 팔을 한 번 더 들고 있다.
아니,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어? 김 선생. 괜찮아요?”
그러자 김 선생이 한숨을 푹 쉬며 대답한다.
“선생님, 저 김 씨 아닙니다. 저 박동욱입니다. 그리고 여기 학교 아니에요.”
“뭐?”
그와 함께 아내행세를 했던 가짜 아내가 나를 찾아왔다.
“아빠! 요즘 도대체 왜 그래, 정말. 하….”
“뭐? 당신 누구야?”
“수정 씨, 여보 등등 하더니 이젠 딸도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해….”
자칭 딸이라는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마치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끝없는 더위에 지쳐 쓰러진 마라토너처럼 절망적인 얼굴이다.
“자, 여기 아빠가 써놓은 거 읽어봐. 이거 잊지 않는다고. 아빠가 절대 잊지 않는다고 했었잖아. 응? 잊으면 안 된다고 아빠가 써 놓은 거잖아.”
55년생 한석현! 기억하자. 석현아. 너는 한석현이다. 00 중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집은 은평구 00동 00 아파트 218동 1803호다. 전화번호는 010-0000-0000이야. 너는 지금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다. 알츠하이머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병이다. 그러니 앞으로 내가 적어놓은 거 꼬박꼬박 읽어야 한다.
너는 서울에서 한태평과 김남숙의 3남 2녀 중 맏이로 태어나 자랐으며 초, 중, 고를 거쳐 사범대에 들어갔다. 그리고 임용을 거쳐 수학 교사가 되었지. 그리고 2009년에 교장이 되었어. 00중을 처음으로 2016년 2월까지 임기를 마쳤다. 그러니 가끔 너에게 선생님이라며 인사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척하며 기쁘게 인사해주어야 한다. 혹시 너의 제자일 수도 있다.
너의 전성기는 30대야. 아내 최수정과 결혼한 3년 뒤인 1985년 첫딸을 낳았잖아. 첫째 딸은 아주 예쁘고 똑똑한 아이야. 네 딸 이름은 한지영. 무엇보다도 너를 잘 따르던 예쁜 딸이다. 어릴 적 한 손으로는 내 손가락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딸기 맛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던 너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야. 지금은 결혼해서 잘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자. 네 딸은 너와 닮은 마치 아들 같은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너에게도 곧잘 아버지 아버지 하며 따를 거야. 사돈어른이 일찍 돌아가셔서, 네가 사위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 네 사위는 아들이 아니니까 헷갈리지 말고. 꼭 기억해라. 아내 최수정, 딸 한지영, 사위 김현수. 네 행복들이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하는 건, 네 아들이다. 죽어서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한지석. 아주 많이 아팠었지.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릴 적부터 기침을 많이 해서. 호흡기 질환을 늘 달고 살았다. 그래서 늘 습도를 조절한다며 가습기를 틀었는데, 그게 문제였다. 지석이가 다시 돌아올 리 없지만, 그래도 네가 죽어 만날 수도 있지 않겠나 싶다. 그러니 죽을 때까지 잊으면 안 되고 죽어서도 잊으면 안 되는 이름이다. 한지석. 네 아들이다. 언젠간 하늘 저편에서 만날 때 아들 이름 한 번은 불러줘야 한다. 알겠지? 네 아들 이름. 한지석이다.
그리고 네 아내 최수정. 사랑만 했지, 돌봐주지 못했던 내 아름다운 사람이다. 네 아내는 친구의 소개로 만났으며, 동기 회사의 경리로 있던 사람을 소개받아서 만난 거다. 1980년 3월 빵집에서 수정 씨를 처음 만났다. 너는 수정 씨에게 한눈에 반해 그녀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물어보았다. 너는 첫 발령지가 지방이었던 터라 계속 전화와 편지만 주고받았다. 그러다 이 년 뒤에 올라와 곧장 그녀와 뜨겁게 열애했다. 같이 걸으며 걷는 곳마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그때를 꼭 기억해야 한다.
수정 씨는 1982년 7월 31일에 나와 결혼했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대학 강당 앞에 서던 그녀를 잊지 말자. 네가 반했던 첫 모습 그대로 결혼식을 걷던 그녀를 잊지 말자. 첫째 딸을 낳고 울던 네 아내를 잊지 말자. 나와 빨간색 르망을 타고 여행을 가다가 지도를 보며 싸우던 네 아내를 잊지 말자. 국이 짜다던 네 투정에 찬물을 확 부어버리던 아내를 잊지 말자. 술을 잔뜩 마시고 와서 죽을 뻔한 나에게 콩나물과 고춧가루, 다진 마늘을 듬뿍 넣어 해장국 끓여주던 아내를 잊지 말자.
그러고 보면 넌 참으로 못된 남편이었다. 늘 너를 뒷바라지하며, 독단적으로 명예퇴직을 택했지. 수정 씨는 얼마나 당혹스러웠는지 너에게 이틀 동안 대화하지 않았다. 아무튼 그 여자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네가 있을 수 있었다. 퇴직하고 아무것도 못 하던 너에게 유일하게 타박해 주던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다. 여자라며 운전도 못 한다고 무시했었지만, 너는 아내에게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반찬 투정 안 하는 법을 배웠으며 정리 정돈하는 법을 배웠다. 이젠 아내 없이 스스로 밥도 해 먹고 빨래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정 씨가 알려준 거 하나하나 다 잊으면 안 된다.
1. 밥 짓는 법
쌀을 투명한 물이 나올 때까지 씻는다.
물을 손등이 잠길 정도까지 얹는다.
백미 쾌속을 누르고 다 되었다는 알림이 울리면 밥을 저어준다.
2. 빨래하는 법
흰옷과 색이 있는 옷, 수건을 나눈다.
각각 세탁물에 세제 한 스푼과 린스 반 스푼을 넣는다.
세탁 버튼을 누른다.
빨래는 꼭 털어서 널어놓는다.
빨래를 갤 때도 꼭 털어야 한다.
한석현. 기억하자! 네 아내는 2022년 3월 23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일은 잊지 말고 꼭 지켜야 한다. 아내의 무덤은 예산 ‘00 공원 34-나 25’이다. 너는 평생 아내만 사랑했으며 아내만 바라보았고 최수정의 남편으로만 살다 갈 것이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은 작고 소복한 안개꽃이다. 아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갓 튀긴 통닭이다. 술을 진탕 마시고 가도 통닭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었다. 아내가 그나마 즐기던 술은 하이트 맥주다. 그러나 술보다 배 음료를 좋아하니 배 음료를 사 가자. 아내는 사위를 정말 좋아한다. 혹여나 사위가 일 때문에 못 가면 사위 사진이라도 들고 가자.
추모 공원 가는 길은 맨 뒷면에 적어놨으니 잊지 말자.
한석현 씨는 절망적인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그러자 오른편에 있던 요양 병원 간호사가 그를 급하게 부여잡는다. 노인네가 갑자기 앉아 골반이라도 다친다면 어떡한단 말인가. 한석현 씨의 파르르 떨리는 동공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기가 아끼던 2016년도 수첩을 보며 계속해서 읽는다. 한 장 한 장을 기억하려고 애쓰듯, 읽었던 부분을 읽고 또 읽는다. 하지만 수첩에 적힌 내용은 기억나지도 않고 믿기지도 않는다. 하지만 본인의 필체이니 아는 척하며 읽으며 또 읽는다.
“미안합니다. 박… 동준 선생님.”
그는 자기가 뺨 때렸던 간호사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에 주위의 인물 사이로 왠지 모를 씁쓸한 향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어색함과 미안함이 공존하여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가자, 아빠. 오늘은 나 조퇴했어.”
“응. 그래.”
한석현 씨는 요양원 현관을 스치며 한없이 초라하게 낡아버린 자기 모습을 발견했다. 비쩍 곯은 몸에 희끗희끗한 머리, 게다가 늘 두 눈에 가득했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지 동공이 텅 비어버렸다.
아, 나는 늙었구나. 현재의 나는 이전의 나를 추월해 조금씩 어떠한 문턱을 넘어가고 있구나. 잘해왔다. 이제 곧이다. 조금만 참고 좋은 모습으로 넘어가자.
그는 이러한 다짐을 뒤로하고 딸의 뒤를 따라갔다. 싸늘하게 식은 딸의 표정에는 복합적인 감정이 섞여 있다. 하지만 한석현 씨는 그 딸의 심정을 알 수 없다. 그저 잠자코 집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어 식탁에 나와 앉았다. 시끌시끌한 드라마 대사와 저녁 차리는 소리가 분주하다. 오늘 반찬은 배추된장국과 제육볶음인가 보다. 식탁에 차려진 밥상을 보며 한석현 씨는 능청스럽게 한 마딜 내뱉는다.
“여보, 나 오늘 점심에 학교에서 제육볶음 나왔는데. 하하. 왠지 당신이 생각나더라. 그냥 여보가 제육볶음을 할 거 같았거든. 아, 나 반찬 가지고 뭐라고 하는 거 아니다.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