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동화
아주 먼 옛날 숲속 커다란 동굴에는 푸른 늑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푸른 늑대는 너무나도 무섭게 생겨서 다들 두려워했답니다. 푸른 늑대의 눈은 겨울바람처럼 매서웠고 푸른 털은 얼어버린 호수처럼 매정했습니다. 게다가 푸른 늑대의 발톱은 매우 날카로워 나무를 꺾고, 강력한 턱과 이빨은 바위를 부술 만큼 단단했지요. 그렇기에 푸른 늑대가 지나갈 때면 산과 나무, 그리고 바위까지 모두 무서워서 덜덜 떨었대요.
그런데 어느 날, 푸른 늑대의 동굴에 하이얀 씨앗이 작은 구멍으로 흩날려 왔습니다. 그리고 푸른 늑대의 옆에 자리 잡았어요. 봄날 아지랑이처럼 홀연히 나타난 씨앗은 그렇게 푸른 늑대 옆에 싹을 틔웠습니다.
“안녕? 넌 누구니?”
초록 새싹이 된 씨앗이 푸른 늑대에게 물었어요. 하지만 늑대는 새싹을 쳐다보지도 않았지요. 어차피 새싹도 자기의 무서운 모습을 보고 도망갈 게 뻔했거든요. 그러나 새싹은 늑대에게 계속 조잘거렸습니다.
“이른 봄바람이 나를 여기로 보냈나 봐. 너는 푸른 털 갈기가 예쁘구나. 나도 너처럼 푸른 꽃잎을 가지고 싶어. 참, 내 이름은 초록 풀이야. 네 이름은 뭐니?”
푸른 늑대는 자기 털 갈기를 보며 예쁘다고 말하는 초록 풀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우 무리와 회색 늑대들은 항상 푸른 늑대의 털을 못마땅해했거든요. 그렇기에 늑대는 귀찮다는 듯 입을 열었어요.
“푸른 늑대.”
“그렇구나. 푸른 늑대야 반가워.”
“그래.”
그렇게 푸른 늑대는 초록 풀과 대화를 끝내려고 했어요. 푸른 늑대는 누군가와 이렇게 대화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초록 풀은 말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루 한시도 쉬지 않고 종알거렸어요. 가끔 푸른 늑대가 나가면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나타나면 다시 입을 열었죠. 어느 하루는 푸른 늑대가 초록 풀에게 물었습니다.
“넌 왜 그렇게 말이 많아?”
그러자 초록 풀은 대답하길 망설였어요. 오랜만에 조용한 초록 풀을 보며 푸른 늑대는 기분 좋게 고독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때 초록 풀이 작은 떨림과 함께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요.
“나에겐 너밖에 없거든.”
늑대는 초록 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왜?”
“나는 움직일 수가 없어. 그래서 네가 부러워. 네 다리는 정말 멋지거든. 튼튼한 네 발로 힘차게 달릴 수 있잖아. 세찬 바람에도 맞서는 푸른 갈기는 또 어떻고. 나는 그저 바람에 움직이지 못하고 흔들흔들하기만 하는 초록 몸짓일 뿐이야.”
초록 풀의 말을 들은 늑대는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자기를 보고 무서워서 피하는 동물들은 많이 봤습니다. 게다가 색이 다르다고 놀리는 회색 늑대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자기보고 멋지다고 하는 생물은 초록 풀이 처음이었거든요. 푸른 늑대는 이제 막 새싹을 틔운 초록 풀을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조용히 그 옆에 다가가 앉았습니다. 푸른 늑대는 초록 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랐어요. 그래서 한참을 초록 풀 옆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자 초록 풀이 늑대에게 웃으며 말했어요.
“푸른 늑대야 고마워. 네 덕분에 따뜻해졌어.”
초록 풀은 그렇게 아직 남은 꽃샘추위에도 푸른 늑대 덕분에 무사히 잘 지낼 수 있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록 풀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늑대에게 부탁했어요.
“푸른 늑대야. 혹시 나에게 물 한 모금 가져다줄 수 있겠니? 너무 목이 말라서 죽을 것 같아.”
아무래도 동굴 안에 핀 초록 풀은 물을 먹었던 적이 너무 오래되었나 봅니다. 그렇기에 곧 말라 죽을 것 같은 몸이었어요. 푸른 늑대는 초록 풀의 부탁을 받고 조용히 일어나 동굴을 나섰습니다. 그러고는 초록 풀에게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힘껏 달리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모든 힘을 다해 달려 본 적이 언제인지 생각나지 않지만 있는 힘껏 땅을 박찼습니다. 무성한 잡초는 늑대의 얼굴을 때렸고, 뾰족한 나뭇가지가 늑대를 할퀴었어요. 하지만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았지요. 그저 산 너머에 있는 큰 바위 호숫가에 가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평소 푸른 늑대를 달갑지 않게 여기던 여우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야, 푸른 늑대다! 변종 푸른 늑대다!”
여우 무리는 푸른 늑대를 보며 낄낄거리며 놀려대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늑대 곁을 알짱거리며 흙먼지를 날리는가 하면, 길가의 돌멩이를 늑대에게 차버리기도 했지요. 하지만 푸른 늑대는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에 여우들은 시시하다며 물러갔어요. 어느덧 푸른 늑대는 호숫가에 다 달했고 입에 물을 잔뜩 머금어 다시 동굴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초록 풀에게 물을 주었어요. 하지만 초록 풀은 이미 얼굴이 바닥에 닿을 정도로 시들했답니다. 이에 늑대는 호숫가에 몇 번을 달려갔다 왔는지 모릅니다. 그저 몸이 뜨거워질 때까지 계속 달려 물을 머금어 왔어요. 그 정성에 결국 초록 풀은 얼굴을 들었습니다.
“푸른 늑대니?”
아직 힘이 돌아오지 않은 초록 풀은 푸른빛을 보며 늑대를 불렀어요. 그러자 늑대가 대답했어요.
“그래. 나 여기 있어.”
“네가 물을 떠다 주었구나. 고마워.”
“그래.”
이 사건을 계기로 초록 풀은 푸른 늑대를 더 의지하게 되었어요. 하지만 늑대는 갑자기 바뀌어버린 상황이 무서웠어요. 거기에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답니다. 혹시라도 초록 풀이 자길 떠나가면 어떡해야 하나. 혹시라도 초록 풀의 마음이 갑자기 변해 자기를 싫다고 하면 어떡해야 하나. 푸른 늑대는 앞으로 없을지도 모르는 연약한 두려움에 갇힌 체 결국 초록 풀을 떠나기로 했어요. 어느 날 잠에서 깬 초록 풀은 푸른 늑대를 찾았습니다.
“늑대야! 푸른 늑대야! 어디에 있니?”
갑자기 혼자가 된 초록 풀은 애타게 푸른 늑대를 찾았어요. 하지만 푸른 늑대는 이미 동굴을 떠난 뒤였지요. 초록 풀은 그런 상황도 모르고 푸른 늑대를 목 놓아라 불렀어요. 그러자 심술쟁이 여우들이 그 목소리를 듣고 찾아왔습니다.
“뭐야? 푸른 늑대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잖아?”
여우들은 동굴에 혼자 남은 초록 풀을 보고 아주 못 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계획은 바로 동굴의 모든 구멍을 막아버리는 것이었죠.
“낄낄낄, 동굴에 구멍이 없으면 저 초록 풀은 죽어버리겠지? 살 곳을 잃은 늑대도 이곳을 떠날 거야.”
‘콰광!’
여우들은 힘을 합쳐 커다란 바위로 입구를 막았고 초록 풀은 어둠 속에 갇히고 말았어요. 초록 풀은 두려움에 푸른 늑대를 애타게 찾기 시작했습니다.
“늑대야! 푸른 늑대야! 도와줘! 여긴 너무 어두워. 무서워. 빛이 없어서 곧 죽을 거 같아!”
한편, 푸른 늑대는 자기가 살던 동굴에서 나는 커다란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순간 푸른 늑대는 망설이지 않고 동굴로 향했어요. 그러자 비열한 여우들이 낄낄거리며 웃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푸른 늑대는 바람처럼 세찬 앞발을 휘둘렀어요. 그리고 강철과 같은 턱으로 여우들을 물었지요. 이런 푸른 늑대의 성난 모습을 본 여우들은 놀라 뒷걸음질 치며 달아났습니다. 늑대는 여우들을 뒤쫓아 혼쭐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도 같았어요. 하지만 두려움에 자기를 애타게 찾고 있는 초록 풀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어요. 결국 푸른 늑대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바위를 부수기 시작했어요.
‘쾅! 쾅! 쾅!’
얼마나 그렇게 두드렸는지, 늑대의 발에서는 피가 났지요. 하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늑대는 바위를 부수고 동굴로 들어갔어요. 그러자 펑펑 울고 있는 초록 풀과 마주했습니다.
“괜찮아?”
푸른 늑대는 처음으로 초록 풀에게 말을 걸었어요.
“푸른 늑대야. 고마워.”
그렇게 초록 풀과 푸른 늑대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푸른 늑대는 그 뒤로 초록 풀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어요. 물이 부족하면 호숫가에 다녀오고 비가 많이 올 때는 물을 막아주었습니다. 해가 부족하면 동굴에 구멍을 만들어 주었고 바람이 세면 초록 풀을 감싸주었답니다. 그러자 어느새 초록 풀에 새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어요.
“푸른 늑대야! 나를 봐! 꽃이 피었어!”
잔뜩 신이 난 초록 풀이 말했습니다. 그러자 늑대가 웃으며 하얀 꽃을 바라보았죠.
“너는 물망초구나.”
“물망초?”
“그래. 너는 초록 풀이 아니라 물망초였어.”
“그렇구나! 네가 그렇게 불러준다면, 나는 물망초가 될게.”
초록 풀은 푸른 늑대 덕분에 물망초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물망초와 푸른 늑대는 매일 함께였어요. 그런데 그것도 잠시, 날이 지날수록 매서운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푸른 늑대야. 나 너무 추워.”
추위에 오돌오돌 떠는 물망초를 보자 푸른 늑대는 조용히 물망초의 곁을 지켜주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겨울이 오는 걸 막을 수 없었습니다. 물망초의 꽃잎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어요. 물망초는 자기가 죽어간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의 시작과 마지막을 함께할 푸른 늑대에게 조심스럽게 말했어요.
“푸른 늑대야. 난 곧 죽을 거야.”
“그런 소리 하지 않기로 했잖아.”
“아니야. 난 알 수 있어.”
“그래도.”
“내가 혹시라도 네 곁을 떠난다면, 나를 잊지 말아 주겠니?”
“응. 그럴게.”
푸른 늑대는 물망초와 약속했습니다. 그 뒤로 푸른 늑대는 사냥도 하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며 물망초 옆을 지켰어요. 이러한 푸른 늑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얀 눈이 내리는 어느 날, 물망초는 잿빛으로 시들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푸른 늑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물망초가 떠난 자리를 지켰어요. 물도 마시지 않고 사냥도 하지 않으며 물망초를 그리워했습니다. 언제는 목 놓아 울기도 하며 또 언제인가 바스러진 물망초의 이파리를 만지며. 그렇게 푸른 늑대는 목숨을 다해 물망초를 기억했습니다. 눈이 오는 날이나, 바람이 오는 날이나, 비가 쏟아지는 날에도 푸른 늑대는 늘 그 자리를 지켰어요. 사냥도 하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고 물망초가 남긴 그 자리에 하릴없이 물망초를 그리워했답니다. 그렇게 푸른 늑대는 그렇게 파아란 털 갈기만 남기고 숨이 멎었습니다.
어느덧 겨울이 지나 봄이 찾아왔어요. 그러자 푸른 늑대의 가죽 사이로 초록 새싹이 튀어나왔습니다. 새싹은 푸른 늑대의 흔적 가운데 피어나 외쳤어요.
“푸른 늑대야! 푸른 늑대야! 어디에 있니? 내가 되살아났어!”
하지만 이미 털 갈기만 남기고 죽어버린 푸른 늑대는 대답이 없었죠. 물망초는 그렇게 한 곳에서 우두커니 죽어버린 푸른 늑대를 발견하고 구슬피 울었습니다. 하얀 꽃잎이 눈물이 번져서 파란 꽃잎이 될 때까지 펑펑 울었다고 하지요. 이제는 아무도 푸른 늑대를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푸른 물망초만큼은 언제나 자기 가슴 속에 파란 털 갈기를 기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는 다른 세상에서 다시 만날 푸른 늑대에게 파아랗게 변한 자기 꽃잎에 대해 조잘조잘하길 기대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