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한 나무 마루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과 동시에, 언제 박힐지 모르는 뾰족한 가시로 인해 오돌토돌 소름이 돋는다. 오래된 마루, 뒤틀린 바닥이 내는 소음은 등골에 식은땀을 흐르게 하고 엄지발가락의 촉각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바닥의 작은 떨림까지 느껴진다. 나는 ‘렘수면’과 ‘비(非) 렘수면’의 어느 중간쯤인지, 이게 꿈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자 내 몸은 점차 떠오르며 몸과 영혼이 따로 분리된 느낌이 들었다.
‘아, 이게 유체이탈(幽體離脫)이라는 건가? 아니면 또 다른 내 망상?’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세계를 탐방한다든지, 자기가 자는 모습을 본다는 등의 현상을 유체이탈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저 낯선 복도 공중에 누워 떠오르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 곧 코가 천장에 닿더니, 한없이 낙하한다.
‘아니구나. 가위구나.’
손가락 까닥하기 힘든 무력감이 내 삶처럼 나를 짓누른다. 몸의 말단 신경까지 곤두세워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하지만, 도통 말을 듣지 않았다. 분명 침대에 누워 있음에도 한없이 추락하는 이 기분은 ‘그’의 편지를 받고부터 시작되었다.
고3이 끝나고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나는 한없는 우울감에 빠져 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전반적인 무언가를 상실했다. 초록색 소주병이 나뒹구는 아빠의 방에는 항상 ‘으어어어’하는 괴상한 소리가 가득했고 두 동생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갑자기 ‘갑상샘 항진증’이라는 이상한 병에 걸려 늘 피로했다. 아니, 피로만 하면 다행이다. 수시로 손발이 떨리고 식은땀이 났다. 가끔은 손이 움직이지 않기도 하여 수시로 불안에 시달렸다.
어느 날은 웬일로 아빠가 멀쩡했다. 멀쩡한 얼굴로 나를 불러 소파에 앉혔다. 사실 얼굴만 멀쩡했지, 옆에서는 옷까지 배어든 술 냄새가 진동했다.
“대학에는 못 갈 거 같다. 미안하다.”
아빠가 오랜만에 멀쩡한 정신으로 한다는 말이 고작 그런 말이었다. 내가 원한 대학은 비싼 4년제 대학도 아니고 근처 2년제 대학으로 졸업하자마자 ‘병원 코디네이터’를 하려고 알아본 곳이었다. 병원 코디네이터가 멋져 보여서도 아니고 돈을 잘 벌어서도 아니었다. 그냥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히 다닐 곳이 없었다. 그리고 두 동생에게 용돈도 줄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도 있을 거 같아서. 마지막으로 꾸준히 직장을 다닌다면 일용직으로 전전긍긍하며 소주나 마시며 매일 밤 고통에 신음하고 나뒹구는 아빠에게 자극을 좀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아빠의 그 한마디는 나에게 무력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아빠가 가지고 있던 불행을 전염시켰다.
“왜?” 예상은 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 사정은 익히 경험했고 무능력한 아빠는 내 기대치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진아. 언니가 재수했잖아. 언니 대학 먼저 보내야지.”
“그래.”
나는 상실감과 배신감, 아빠로부터 전이된 우울을 모두 숨겼다. 그때 ‘그’를 만났다. 그는 그 시절 나를 유일하게 아껴주는 사람이었으며, 아픔을 공유하는 친구였고, 철저하게 짓밟힌 날 일으켜주는 구원자였다.
그렇게 스무 살의 청춘을 허송세월하기 싫어 선택한 것은 편의점 아르바이트다. 대학도 못 갔고 직장에 취업할 준비도 못 했다. 그렇다고 가만히 집에서 놀 수만은 없었다. 내 삶은 가만히 있다고 해서 용돈이 떨어지는 그런 안일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울하다고 집에서 영화나 보고 있기엔 우리 집은 너무 위태했다. 혹시라도 아빠가 내년에 대학을 못 보내줄 걸 대비해야만 했던 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때 ‘그’가 나타났다. 그는 내가 일하는 편의점의 단골손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시가 멘솔’ 주세요.”
겨울 추위에 질린 새하얀 피부에 종이가 찢어질 거 같은 날카로운 콧날이 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멘톨 담배를 피워서인지 항상 그의 입술은 새빨갛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갈색 패딩 조끼 주머니에 한 손을 집어넣고 다른 한 손으로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했다. 그러고는 내 앞에 다가와 바짝 섰다.
“네? 뭐라고 하셨죠?”
겨우 계산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하는 터라 심장이 떨렸다. 그는 차분하게 미소 지으면서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 뒤에 있는 거 주세요.”
“아, 네.”
그는 내가 담배 이름을 잘 모르는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때 그의 갈색 패딩 조끼가 꿈틀거렸다.
“어?”
나도 모르게 난 소리에 그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세상 힘든 일 안 겪어봤을 환한 미소였다.
“아, 죄송해요. 혹시 강아지 데리고 안에 들어와도 괜찮나요? 털 안 날리게 제가 계속 품에 안고 있을게요.”
그의 품 안에서 작은 강아지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가 수줍은지 다시 그의 패딩 조끼를 파고들었다. 아직 새끼라서 그런가 앳된 모습이 매우 귀여운 강아지였다. 그의 패딩 조끼는 끝부분이 밴딩으로 처리되어 있고 그가 손으로 조금 받쳐서 작은 강아지의 몸무게를 너끈히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네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강아지가 엄청 귀여워요. 무슨 종이예요?”
“포메라니안이요.”
작은 몸집에 솜뭉치 같은 하얀 털, 거기에 두상은 어찌나 작은지 내 작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모두 가릴 수 있을 정도다. 게다가 성격은 어찌나 순한지 낯선 나를 보고도 눈을 껌벅껌벅한다.
“감사합니다. 아직 어려서 집에 혼자 두고 다니기가 미안해서요. 친구처럼 항상 데리고 다니고 있어요. 밖에 두려니 아직 어리고 너무 춥기도 해서요.”
“동네 편의점인데요. 괜찮아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내가 괜히 나섰나 싶었다. 편의점 점장도 아니고 일개 아르바이트나 하는 주제에, 게다가 사장이 CCTV를 돌려볼 텐데 이러다가 나한테 뭐라고 한 소리 하는 거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그리하여 결국 내가 그에게 베풀던 편의는 의문으로 바뀌었다.
“어, 아마 괜찮을걸요?”
그는 웃었다. 그냥 그렇게 웃으며 뒤돌았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향기만 남겼다. 마치 없었던 사람처럼. 그리고 곧 그의 향기가 흔적으로 남아 잔향을 일으켰고 곧 희망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의 모습이 점차 또렷하게 각인되기 시작했다. 이에 때마침 피어난 순간의 희망은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래. 물어보자!
나는 갑자기 그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저기. 이름이 뭐예요?”
그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며 나갔다.
“이춘복이요.”
그가 그렇게 나가고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강아지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었는데….
편의점 아르바이트는 좋았다. 웃을 일이 없던 나에게 억지로 미소 짓게 하는 일이었기에, 스스로 속이며 웃으면 정말 웃긴 것 같았다. 하루 중 웃을 수 있는 시간은 대부분 편의점에서 일하며 손님을 맞을 때였다. 그 외의 시간인 아침에는 동생들을 학교에 보내고 저녁에는 술에 찌들어 누워서 괴성을 내는 아버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완벽한 타인의 입장으로 나에게 잔소리하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지루함에 불안감을 느낄 틈이 없다. 그래도 편의점에서는 웃어야 하니까, 그나마 낫다.
그러나 편의점에서 돌아와 혼자 씻고 있자면, 헐벗고 가난해 초라한 몸뚱어리가 거울에 반사되어 비추었다. 내가 내 몸 구석구석을 언제 그렇게 관찰해 봤을까. 짧은 다리에 까무잡잡한 피부. 젖은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죽어버린 눈동자와 더불어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은 다이어트며 운동이며 열심히 몸을 가꾸던데, 그들과 비교하면 한없이 볼품없는 이 눈에 들어온다. 아마 친구들은 내 불행을 잣대 삼아 자기 자존감을 높이며 행복의 기준을 낮춰 자기 위로하겠지.
다만 편의점에서는 그런 생각할 필요 없이 바빴다. 사거리에 위치해서 손님이 많았다. 게다가 물품도 많이 들어오며, 튀김까지 해 놓아야 했다. 그나마 유일한 낙은 ‘그’가 들어와 시가 멘톨을 사는 일이다. 이런 촌구석에서 살 것 같지 않은 ‘그’와 ‘춘복이’은 매일 여섯 시 반쯤이면 이곳, 편의점으로 왔다. 그는 매일 똑같았다.
털이 새하얀 춘복이를 품에 숨겨 들어와 캔 커피 한 개와 담배 한 갑을 산다. 그렇기에 여섯 시쯤 되면 나도 모르게 서서 그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가 왔다.
“어서 오세요.”
“이거랑 시가 멘솔 주세요.”
그가 따뜻한 캔 커피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춘복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 춘복이는요?”
“네?”
내 물음에 그는 잠시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내가 배를 가리키자 곧 자기 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아, 강아지는 집에 있어요. 너무 안고 다니면 안 된다고 해서요.”
“그래요? 다행이다. 춘복이가 아픈 줄 알았어요.”
“아하하. 네.”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묘하게 분위기가 이전과 달랐다. 나에게 말할 듯 말 듯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가 카드를 꺼내자, 그 뒷면에 있는 ‘교육지원청 출입증’이 보였다.
“교육 쪽 공무원이신가 봐요.”
나는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시가 멘톨을 꺼내며 그가 나에게 이름을 물어보는 헛된 망상을 꺼내 봤다. 그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네. 혹시 그쪽은 이름이 뭐예요? 아, 저는 정여진이요. 예쁜 이름이네요. 감사합니다. 혹시 번호 물어봐도 되나요? 어머, 지금 저한테 작업 거는 건가요? 네, 맞아요.
아찔하면서도 발칙한 상상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현실의 그는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얼버무리듯 말한다.
“아니요. 공무원은 아니고….”
당시에는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이 다 공무원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를 통해서 공공기관에는 공무원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상담교사입니다.”
그때의 나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그렇기에 넓은 세상에 수많은 직업을 내가 알 리 없었다. 초, 중, 고등학교를 지나오면서 ‘상담교사’라는 선생님을 본 적이 없었고 그런 사실을 모른다고 말로 내뱉는 것이 실례인지 몰랐다.
“그게 뭐예요?”
“어…. 교육지원청에 ‘WE 센터’라는 곳이 있는데, 각 학교에 심리적으로 힘든 학생들을 도와주는 교사를 상담교사라고 합니다.”
“교사요? 선생님이세요? 와, 그럼 공무원이네요?”
“아니요. 저, 저는 기간제라 공무원은 아니에요.”
“예? 기간제요?”
“쉽게 말해 교육청과 계약해서 일하는 교사….”
대답을 마친 그의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때는 그가 생각보다 내성적인 성격인가 보다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내 무지함은 그의 가슴을 쿡쿡 찔러 상처 냈고 그는 애써 웃었다. 그래도 눈치만은 있었는지 내가 그에게 무언가 잘못했다는 기류를 읽을 수는 있었다. 그의 어색한 웃음. 빨리 계산하려는 손짓, 나와 마주치지 않는 눈빛. 모든 것이 경고음을 울리며 빨간 비상등을 깜박이게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애써 웃었듯, 나도 애써 그 경고를 무시했다.
그는 일주일 정도 편의점에 오지 않았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건 이틀 뒤였다. 그는 이틀에 한 번 꼭 담배를 사러 왔는데, 그날따라 아무리 기다려도 그가 오지 않았다. 야간 아르바이트생이 도착해도 한참 편의점 앞을 서성거렸다. 왜일까, 그는 왜 오지 않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 깨달았다. ‘아, 내가 큰 잘못을 했구나.’ 나는 스물 조금 넘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 성찰을 했다. 뭘 잘못했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다. 그냥 그때의 분위기와 느낌이 그랬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정말 아둔하다고 느껴진다. 이전까지의 나는 스스로 뒤돌아본 적이 없었다. 공부라고는 해본 적도 없고 누군가 깊게 사귀어보거나 한 적도 없다. 가족 외의 인연은 모두 한 때뿐이었고 오랫동안 즐겨본 취미도 없다. 도대체 나는 뭐 어떤 망상에 사로잡혀서 이렇게밖에 살지 못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게다가 보통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하고 바뀌려고 발버둥이라도 칠법한데, 집에 가니 다시금 무력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술에 취한 아빠가 ‘으어어’하고 고성을 지르고 있으며, 아랫집 사람인지 옆집 사람인지 모를 사람이 우리 집 현관을 두드리고 있다. “저기요. 좀 조용히 좀 하라고요!” 나는 그 사람을 조용히 지나쳐 계단을 한층 더 올랐다. 그렇게 우리 집이 아닌 척, 안에서 들리는 아빠의 괴성과 밖에서 눈총을 주는 이웃의 따끔한 눈총을 무시하고 맨 위층까지 올라갔다. 우리 집이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러다 문득,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상상을 했다. 이웃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나는 조용히 계단을 내려가 무작정 밖을 걷기 시작한다. 고요한 어둠 속, 아무도 없는 세상에 가로등만 골목을 비추고 있고 나는 걷기 좋은 공원을 홀로 걷고 있다. 그러다가 점차 인영이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나 홀로만 고요했다. 아빠가 내던 괴성과 끔찍한 상황 때문인지, 나 혼자 소리와 풍경을 차폐했고 그렇게 고요하다 착각하며 걷다가 정신이 든 것이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하얗게 질린 얼굴의 ‘그’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가 그의 옆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황급히 눈물을 닦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그는 내 물음에 금방이라도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애써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여태껏 보아왔던 그의 표정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아주 잠깐 판매원과 손님으로 보던 얼굴이지만, 자주 봐서 익숙했던 그 얼굴과 표정. 아마 그도 슬픈 것이다. 순간 나는 그에게 공감했다. 어떤 일이 생겼는지 모르고 무슨 이유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위로의 행동이나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옆에 조용히 앉아서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그를 위로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때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기르던 강아지가 죽었어요.”
“네? 춘복이가요?”
기르던 강아지가 죽었다는 그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말했다. 그러자 그는 슬픈 눈으로 웃었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웃을까 울까 하는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보았다. 그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숨을 크게 내쉰다.
“아니요. 어, 네 맞아요. 강아지는 죽은 거 맞아요. 그리고 아닌 거는, 이춘복. 그건 제 이름이에요.”
나는 그의 강아지가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그에 대한 연민보다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그가 편의점에 오지 않은 건 나 때문이 아니었구나. 그리고 그는 강아지 이름을 알려준 게 아니라 자기 이름을 알려줬던 거구나. 그리고 그 안도감은 곧 용기로 변했다.
“괜찮아요. 그리고 괜찮을 거예요.”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건 춘복 씨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게 우리의 첫날이었다. 춘복 씨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일이 끝나는 매일 만났고 마치 ‘상상 친구’에게나 말할 법한 상처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했다.
“나는 사실 죽고 싶었던 적이 너무나도 많이 있어. 중학생 동생이 두 명이나 있어서 아직 용기가 없어서 그렇지. 아마 걔네가 아니었으면 전 지금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 일용직 노가다를 전전긍긍하는 아빠는 알코올중독으로 맨날 술에 찌들어서 이상한 소리나 내고 있고 엄마는 언니만 편애해. 언제는 엄마가 나랑 동생들 몰래 언니한테만 고기를 먹이더라. 언니는 재수해서 4년제 대학에 갔는데, 나는 고작 등록금이 없어서 지방 전문대학에도 못 가고 있어. 편의점은 그래서 일하고 있는 거야. 할 게 없어.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할 게 없어서.”
그러면 그는 우선 고개를 끄덕여준다. 무조건적 수용. 그는 그걸 먼저 해준다. 그 후 그는 나에게 이런저런 위로를 했다.
“설마. 엄마가 다 똑같이 사랑하지 어느 한쪽만 좋아하겠어?”
“아니야. 진짜야. 사실 우리 엄마는 진짜 엄마가 아니거든. 진짜 엄마는 나와 동생을 낳고 도망갔어. 사실 얼마 전에도 엄마를 보러 갔거든. 그런데 엄마는 그냥 나보고 알아서 잘 살래. 나는 거기서 이젠 엄마와는 완전한 타인이라는 걸 깨달았어. 지금 엄마? 아마도 같이 산 지는 칠 년 정도 되었을 거야. 맨 처음에는 많이 안 맞았지. 맨날 싸웠어. 서로 이해가 안 된다고 소리치면서 소통을 단절하기도 하고. 하지만 이젠 괜찮아. 그래도 제법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지금 엄마밖에 없거든. 게다가 엄마는 맨날 맞아. 그러면서도 아빠랑 같이 살아주고 있어. 아빤 술 갖고 오라고 소리 지르고 엄마는 그만 좀 하라고 악 지르고. 그러다 싸우면서 맞아. 그러면 집엔 아빠 말곤 아무도 없어. 엄만 그런 아빨 두고 나가버리거든. 그럴 땐 온 세상이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거 같아. 아빠 혼자 나뒹굴고 있는 집에 들어갈 땐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사실 그럴 때면 아빠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해. 왜 부모자식 간은 애증의 관계라고 하잖아. 사랑하면서도 혐오스러워. 아빠가. 가끔은 아빠가 술을 하도 마셔서.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갑자기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망상을 해. 그런 망상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자고 있는 아빠를 보면 몰래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거든. 그러곤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금 아빠를 경멸하지. 그리고 끔찍한 나 스스로를 증오해.”
그는 이렇게 못난 내 속을 듣고도 잠잠했다. 학창 시절 몇몇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하면 그들은 곧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위로하고 공감하며 같이 욕해주었다. 물론 그때는 그게 좋았던 적도 있다. 주목받고 우울에 취해 아이들의 분위기를 이끄는 그런 감정 말이다. 그게 당연히 좋은 줄로 알았다. 하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내 말이 끝날 즈음 그는 내 손을 잡곤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더 잘해줄게.”
그는 가끔 주말에도 편의점에서 일하는 나를 위해 내 옆에 쪼그려 앉아 책을 읽었다. 그가 읽는 책은 도통 모를 소리만 적어 놓은 괴상한 책이었다. 니체가 말하는 인생은 어떻다느니, 프로이트가 말하는 인간의 발달 단계니 하는 제목부터가 접근하기 힘들었다. 그는 편의점 판매대 옆에 다리를 꼬고 앉아 한참을 같은 페이지에 머물렀다. 가끔 문학을 읽기도 하였는데, 그마저도 라이트노벨이나 웹 소설만 읽었던 나에겐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그래도 그가 그런 책을 읽음으로 듣기 좋은 예쁜 말들을 종종 들었다.
“너는 윤하의 노래 같아.”
“윤하? 가수 윤하?”
“응. 언제나 씩씩하고 잘 이겨내잖아. 윤하의 노래는 다들 그런 느낌이야. 슬픈 노래를 들어도 그 목소리에 힘이 있어. 어떤 사람들은 종종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의미를 갖고 살아가기도 해. 하지만 너는 몸부림치며 살고 있잖아. 네 몸부림 자체만으로 너는 이미 활짝 핀 꽃이야.”
그땐 그가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그냥 꽃이라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가끔 그는 자기 옛이야기를 마치 자기가 겪은 일이 아닌 것처럼, 한때 꾸었던 꿈처럼 이야기할 때가 있었다.
“여진아. 꿈속에 그 애는 형이 죽도록 미웠어. 형은 늘 걔를 때렸거든. 자기 뒤처리 안 한다고 손가락으로 꼬집고 주위에 있던 물건을 던졌어. 어떤 날은 아빠의 재떨이에 머리를 맞아 피를 철철 흘린 적도 있어. 그런데 걔네 엄마 아빠는 방관자였어. 둘째가 피를 흘려도 무관심했고 맞아서 뼈가 부러져도 동생이 이해하라는 식이였거든. 형은 늘 못 알아들을 말만 했어. 갑자기 방방 뛰는가 하면, 귀를 막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어. 어떤 날은 좋아하는 소시지가 없다고 화를 내다가 걔를 포크로 찔렀어. 그래도 옆에 있던 엄마 아빠는 형을 감쌌대. 걔는 그래서 형이 죽었으면 했어. 그런데 또 막상 형과 떨어지니 형이 걱정되더래. 엄마 아빠는 은퇴해서 한적한 시골에 살면서 형을 돌보는 게 꿈이래. 나 참, 그런 망상적인 꿈은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생기는 거야? 엄마 아빠가 일할 때 형은 시설에 맡긴대. 그래서. 은퇴하고 꼭 집에서 잘 도와주고 싶대. 그런데 엄마 아빠는 자기들이 형보다 일찍 죽을 걸 모르는 사람 같아. 결국 그 동생한테 책임과 고통이 전가되는 걸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지.”
“사촌 동생 사연이랑 똑같네. 사촌 언니는 자폐성 장애가 있대. 그것도 아주 심한. 그런데 가끔 사촌 동생이 그 언니에 대해 그렇게 말하더라.”
나는 붉어지는 눈시울로 그를 위로했다. 그는 그럴 때면 나를 꼭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이전까지 다른 이에게 들으면 낯부끄럽고 간지럽던 말이 그로부터 나오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월세로 지내던 집은 내 도피처가 되어주었다. 동생들이 학교에 가고 아빠가 술을 들었을 때, 엄마와 아빠가 서로 고성으로 싸울 때, 대학교 방학이 되어 언니가 집에 있을 때. 그럴 때는 모두 그의 집으로 갔다. 티브이도 없는 방에서 조그마한 핸드폰 화면을 한 손씩 나눠 들고 깔깔거렸다. 또한 사랑을 나누고 각자 책을 보거나 SNS를 훑고 있자면 집 같은 안정감이 들었다. 어느 날은 그가 왜 나 같은 걸 만나고 있는지 물었던 적이 있다.
“오빠는 왜 나를 만나?”
“왜 너를 만나냐니?”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나’가 아니라 ‘나 같은 사람’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이유는 모른다. 그냥 그런 표현이 더 어울릴 듯했다. 그때는 자존감이니 자아니 하는 것들에 대한 지식도 없었을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그냥 그렇잖아. 내가 대학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좋은 직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특출 나게 예쁜 것도 아니고. 나도 알아. 내가 오빠보다 한참은 그렇다는 걸.심지어 난 갑상선 약도 없으면 불안해서 밖에 못 나가.”
마지막엔 남은 자존심 때문에 차마 높고 낮음을 뜻하는 단어를 쓰지 못했다. 그저 ‘그렇다는’ 등의 애매한 표현으로 나를 포장하려고 했다. 하지만 대화 맥락을 잘 파악하던 그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어때서? 너는 어리잖아. 나는 스물일곱이고 곧 서른이 되겠지. 그에 반해 너는 이제 막 스무 살이야. 앞날이 무궁무진해. 어떻게 살지, 어떻게 변할지는 네 손에 달려 있어. 그러니 그런 생각하지 마. 어리다는 것이 얼마나 큰 무기가 될 수 있는데.”
그때는 그의 말에 크게 공감했었지만, 나중에 지방 대학에 들어가고 나니 내가 한참은 잘못 생각했단 걸 알았다. 살얼음같이 차갑고 쉽게 부서지는 사회에서 공부하며 관계 맺고 직장을 구하여 사회생활 하는 모든 것이 어린 나이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의 긍정적인 시선이 좋았다.
그는 밤이 늦으면 늘 나를 바래다주었다. 새벽까지 같이 있고 싶었건만, 10시가 되기 전이면 늘 우리 집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늦게 들어가도 괜찮다니까?”
“부모님이 걱정하셔.”
“절대 아니야. 들어오든 안 들어오든 신경도 안 쓸걸?”
그때 엄마가 커다란 캐리어를 끌며 집을 나오는 걸 목격했다. 그 야심한 밤에 선글라스를 낀 엄마는 나를 어떤 표정으로 보았던 걸까. 도무지 눈을 숨긴 엄마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와 나, 엄마가 멈추어 섰다. 사실 그때의 ‘한참’이 정확히 몇 분 몇 초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나에게는 ‘한참을’이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그 시간이 찰나였던 것 같다.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지, 선글라스 속 멍든 눈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너는 제대로 된 남자 만나라. 네 아빠 같은 남자 만나지 말고.”
그렇게 스치듯, 7년 동안 엄마 노릇을 했던 사람이 지나갔다. 마치 길을 걷다가 스친 행인처럼 혹은 어쩌다 같은 버스를 탔던 승객처럼. 그렇게 홀가분하게 지나갔다. 엄마는 옆에 서 있는 그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매몰찼다.
엄마를 보낸 나는 한동안 허무하게 지냈다. 이럴 거면 언니 대학 등록금이고 뭐고 대학이나 갈걸. 그리고 이렇게 떠날 사람에게 뭐 하러 정을 붙였던 걸까. 또 이렇게 떠날 거면서 왜 엄마는 맹장 수술할 땐 보호자랍시고 종일 내 옆에 앉아 있었을까. 한편으로는 아빠가 맨날 술에 찌들어 사니,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친엄마도 이런 아빠가 한심해서 떠났을 수도 있다. 그래. 결국 나라는 존재는 그저 술기운과 한 번 불사르듯 일어난 뜨거운 욕정에 태어난 하찮은 결과물이다. 한없이 초라하고 나약하다.
이런 나에게 그는 조심스럽게 위로해 주었다.
“그래도. 대학에 안 간 덕분에 나를 만났잖아.”
하지만 그도 계속해서 내 곁에 있진 않았다. 어느 날인가 그가 나에게 고백하듯 말했다.
“나. 정식 상담교사가 되고 싶어. 계약직 말고. 임용 고시를 봐서 정식으로 일하고 싶어. 왜 떠나신 어머니가 그때 그렇게 말했잖아. 제대로 된 남자 만나라고. 나 진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물론 계약직이라고 안 좋은 사람이란 건 아니야. 그냥. 우리가 만약 결혼 한다면 둘 중에 하나는 안정적으로 벌고 싶어. 내가 스물 후반이 되니까 조금 더 현실적이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게 되어서 그래.”
나는 반대했다. 우선 우리가 ‘만약’ 결혼한다면이라는 말에 꽂혀 화가 났다. ‘만약’이라니. 그럼 나는 살면서 수없이 만나는 경우의 수 중 하나라는 말인가 싶었다. 나는 그의 확신 없는 말투가 짜증이 치밀었다. 게다가 그는 임용 공부를 위해 서울 노량진에 방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내가 아무리 멍청하고 아둔해도 알 건 다 알았다. 노량진은 말만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사실 외로운 남녀가 만나 서로 위로하며 사귀고 헤어지길 반복하는 동물의 왕국 같은 곳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남았다.
“너도 이제 대학에 가서 공부해야지. 우리 조금만 더 발전의 시간을 갖자.”
그렇다. 우린 헤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리만 멀어질 뿐, 우린 서로 ‘발전의 시간’을 가졌다. 나는 스물한 살에 대학에 진학했고, 그는 스물여덟에 임용 고시 준비를 했다. 완전히 각자의 시간을 가진 건 아니다. 나는 가끔 그가 머물던 노량진에 찾아갔고 그도 내가 다니던 대학에 찾아왔다. 늘 손가락이 허전했던 나는 그에게 왜 반지를 맞추지 않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전까지의 연인들은 다 반지를 맞추면 모두 헤어졌다고 말했다. 나는 또 ‘전 연인’들과 ‘나’를 비교하는 것에 꽂혀 화가 치밀었다. 괜한 것에 트집을 잡고 짜증 내고 신경질 부렸다. 그러자 그는 늦게나마 내게 화난 이유를 깨닫고는 불쑥 나에게 찾아와 미안하다고 했다. 그는 황급하게 주머니에서 네임펜을 찾더니 나를 주위 벤치에 앉혔다. 바람은 선선했고 가로등 빛은 밝았다. 벚꽃은 흐드러지지만 어두운 밤이었기에 그 소리만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그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결혼 행진곡을 흥얼거렸다.
“이번 임용에 합격하면 나랑 결혼하자.”
그의 말에 유치했던 내 분노는 눈 녹듯 사그라들었다. 그는 네임펜으로 내 약지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그려줬다. 이 또한 유치했지만,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약지에 있던 그림 반지 대신에 진짜 반지를 끼워주었다. 약식이지만 약혼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서운해하지 말라며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나는 그보다 한참을 미숙했던 나를 반성하며 고맙고 미안함을 전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다.
대학의 축제 날, 친한 동기 몇 명과 술자리를 가졌다. 남자 셋, 여자 둘. 나까지 포함하면 총 여섯 명이다. 그중 나를 좋아한다며 따라다니는 한 살 어린 남자가 있었는데. 마지막 술잔을 넘긴 기억을 끝으로 눈을 떠보니 그 남자애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나는 황급히 핸드폰을 들어 어찌 된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했다. 처참하게 널브러진 속옷과 간절함이 느껴지는 그의 부재중 전화. 메시지들.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자 나와 잠자리를 함께한 남자 동기가 헐레벌떡 뒤쫓아 왔다.
“어디 가!”
“너 제정신이야?”
“뭐? 왜 그래? 뭐가 문제인데?”
“나 남자 친구 있다고 몇 번을 말했어!”
그러자 남자 동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두 눈을 껌벅였다.
“무슨 말이야? 어제는 다 꿈같은 거라며.”
“뭐?”
“누나가 어제 술김에 말했잖아. 그냥 힘들어서 누나 혼자 상상했던 거라고. 그러니 진짜 위로가 되었다고 말했잖아. 그거 반지도 그냥 혼자 맞춘 거라며.”
죄지은 것처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그런 말을 했을까? 아니다. 그는 분명히 존재한다. 아직도 그로 인해 치유받은 상처의 흉터가 명확하다. 그리고 약지에는 반지를 그렸던 자국이 남아 있으며, 끼워진 반지 이면에는 그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알고 있었다며. 다. 그냥 편의점에서 일하다가 담배 살 때, 주민등록증 보고 이름이랑 나이 알았고. 가끔 명찰을 안 빼고 와서 어떤 일 하는지 알게 되었고. 아이 씨, 내가 왜 이런 걸 설명하고 있어?”
남자 동기는 허탈한 표정으로 짜증을 냈다. 그러고는 나를 스쳐 지나가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지하철로 향했다. 그 애의 말이 사실일까? 나는 지금까지 내 망상과 헛짓을 하고 있던 걸까?
나는 곧장 ‘그’에게 전화했다. 그러자 다행히도 그는 내 전화를 받았다.
[뭐야! 왜 어제 연락이 안 된 거야?]
그의 걱정 섞인 말에 나는 차마 술에 취해 다른 남자와 있느라 못 받았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내 마음에 비수를 꽂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괜찮아?]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그 말이 나에게는 날카로운 칼처럼 느껴졌다. 그러니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말했다.
[나 다른 남자랑 잤어. 우리 헤어지자. 미안해.]
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때 나는 느꼈다. ‘아, 그는 내 망상이구나.’ 왜 엄마가 우리 가족을 떠날 때, 그를 안 돌아보았는지. 그를 앞에 두고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라고 한 건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왜 기를 쓰고 싸우지 않아도 우리는 서로 잘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어 준 건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라는 '망상'은 나를 원망하듯 말했다.
[너희 친엄마랑 너랑 다른 게 뭐니? 필요할 때만 빼먹고 버리는 거. 똑같잖아.]
망상은 차분하게 나를 쏘아붙였다. 그 말은 실제로 나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 하지만 망상의 말이 맞았다. 결국 내가 무너질 거 같으니 나 혼자 상상해 만들어 놓고 이젠 필요 없으니 사라져 달라고 말하는 내가 그의 입장에서는 잔혹할 수밖에 없다.
[네가 장애 있는 형이 있는 기분을 이해한다고 말했던 건, 모두 거짓이었어?]
[미안해.]
[그 남자가 그렇게 좋아?]
[아니. 아니야. 오빠가 제일 좋아.]
[그런데 왜? 이해할 수가 없어.]
차마 당신이 내 상상으로 만들어 낸 망상이란 걸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어, 그래. 나는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라는 망상은 잔혹한 말만 내뱉고는 사라졌다. 다시금 전화하려 해도 없는 전화번호였다.
결국 힘든 날 나를 지켜주고 위로하던 내 망상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런 줄 알았던 망상이었는데, 아빠가 끊었던 술을 다시 마시던 그날, 그에게서 편지가 왔다.
정여진 씨에게
안녕하신지요.
저는 차마 안녕하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행복을 누구보다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임용 시험이 끝나고 여행을 하고 있어요. 여행을 하던 중 빨래할 일이 있어 이곳 빨래방에 잠시 들렀습니다. 아직도 여기에는 나와 당신의 흔적이 가득하네요.
당신은 방학을 잘 지내고 있겠죠? 아마 어디서든 씩씩하게 윤하 노래처럼 견디고 이겨낼 거예요. 아직도 이 동네는 똑같고 정겹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동네가 너무 지긋지긋해요.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거든요. 프로이트, 융, 피아제 등의 인물들이 나를 위로해 줬습니다만, 결국 그들의 이상 좇는 말보다 당장의 현실이 더 와닿았어요. 당신은 내 삶 어디에나 있었다가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이 갑자기 사라졌잖아요. 아, 그렇다고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의 아버지가 술을 끊길 바라며, 당신의 동생도 늘 무탈하고 건강하게 자라길 기도해요. 난 정말로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늘 힘들었잖아요.
그래도 우리 이제 앞으로는 만나지 않기로 합시다. 당신은 멋진 병원 코디네이터가 될 거고. 나는 정식 상담교사가 될 거잖아요. 우리가 서로 만난다면 아마 내가 아프다거나, 당신의 자녀가 정신적으로 힘들었을 때가 될 거예요. 그러니 우리 이제 만나지 않기로 해요. 서로가 힘들었던 만큼 성숙해지기 위한 시간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우리.
우리의 인연은 딱 거기까지였던 겁니다. 그러니 너무 후회하지도, 자책하지도 않기로 해요.
그럼, 언제나 행복하시길.
0000년 00월 00일
이춘복 드림.
어느 날 갑자기 도착한 편지에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혹시 그는 내 망상이 아니었던 건가? 그는 실제로 존재했나? 우리의 관계는 실존한 것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반대로 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존재에 관한 유무를 알 수 없었다. 급하게 핸드폰에서 그의 연락처를 찾아본다. 하지만 이미 지우고 없다. 메신저와 그와 주고받았던 문자들은 이미 핸드폰을 바꿔 사라졌다. 그리고 아무리 그의 번호를 기억하려고 해도 지금 만나는 남자 친구의 번호 말고는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급하게 SNS를 검색했다. 93년생에 이춘복이라는 이름이 흔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담교사라는 직업도 쉽게 접할 직업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진짜 그를 찾았다.
이춘복 93년 8월 21일 생일. 내가 알던 그가 맞다. 경기도 광주시 거주. 00 교육지원청 WE 센터 상담교사. 프로필이 아주 명확하게 게시되어 있는 걸 봐선 그는 망상이 아니었다.
나는 그의 흔적을 찾자마자 그가 일한다던 교육지원청으로 무작정 향했다. 미안하다고. 내 정신이 온전치 못했다고. 그에게 고백할 작정이었다.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사실만큼은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하릴없이 교육청 주변을 서성이자 한 여자와 웃으며 대화하는 망상이 아닌 ‘그’가 걸어 나온다. 그와 웃으며 대화하는 여자에게 불같이 화가 일었지만 침착하게 참았다.
“이춘복!”
내가 그의 이름을 반갑고 애타게 불렀다. 그러자 그는 새삼스럽게 놀라며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제 이름을 어떻게 아세요? 누구… 시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아, 예. 어…. 그런데 뭘 잘못하셨길래.”
“미안해. 그러니까 모른 척은 하지 마.”
옆에 있던 여자는 그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인다. 그러고는 황급히 나를 지나쳐 교육청 문밖을 나섰다. 인사라도 한 걸까. 하지만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 정말 오빠밖에 없었어. 그 남자애도 정말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 아니었어. 그런데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 내가 그땐 정말 미쳤었나 봐. 어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말 미쳤었어. 알지? 나 좀 힘들었던 거. 아빠는 맨날 술만 마시고 엄마는 도망가고. 동생들은 철도 안 들었고. 다 알잖아.”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왜, 왜 그래요?”
그의 말에 나는 터질 게 터져버렸다. 그래서는 안 됐는데.
“왜 그래! 편지까지 써 놓고!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 아는 척만 해줘.”
나는 그에게 가방을 던지고 원망하듯 외쳤다. 그러자 그와 같이 나오던 여자가 경찰과 함께 나타났다.
“저기요! 저기 있어요. 미친 사람!”
이후 나는 몇 번의 합의 끝에 병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아직도 뭐가 진실인지 모르겠다.
나는 병원 복도를 맨발로 걷는다.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다.
투박한 나무 마루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느낌과 동시에, 언제 박힐지 모르는 뾰족한 가시로 인해 오돌토돌 소름이 돋는다. 오래된 마루, 뒤틀린 바닥이 내는 소음은 등골에 식은땀을 흐르게 하고 엄지발가락의 촉각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바닥의 작은 떨림까지 느껴진다. 나는 ‘렘수면’과 ‘비(非) 렘수면’의 어느 중간쯤인지, 이게 꿈이란 걸 깨달았다. 그러자 내 몸은 점차 떠오르며 몸과 영혼이 따로 분리된 느낌이 들었다.
‘아, 이게 유체이탈(幽體離脫)이라는 건가? 아니면 또 다른 내 망상?’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 세계를 탐방한다든지, 자기가 자는 모습을 본다는 등의 현상을 유체이탈이라고 하던데. 나는 그저 낯선 복도 공중에 누워 떠오르기만 할 뿐이다. 그러다 곧 코가 천장에 닿더니, 한없이 낙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