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영배 Oct 21. 2022

마디풀

사람 말고 누구도 이따위 곳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따위 곳에 왜 날

낳아놓은 거야?

 - 이영광, <이따위 곳> 부분    

                                                                      


위 사진을 보세요. 이영광이 쓴 시 <이따위 곳>이 이해가 가지 않으세요? 저 같으면 “왜 이따위 곳에 날 낳아놓은 거야?”하고 부르짖으며 누구에게든 따져 물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아닌 저 풀도 저와 같은 마음이 없을까요?  

   

저 잡초의 이름은 마디풀입니다. 대나무처럼 수많은 마디로 이루어져 있어 붙은 이름입니다. 길 위나 길 가장자리에 주로 자라며 땅바닥에서 수많은 갈래로 갈라집니다. 때로는 위로 서거나 비스듬히 자라는 것도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이나 짐승의 발에 밟히면 땅바닥을 기면서 살아갑니다. 아예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놈도 있습니다. 굴욕인가요? 이 풀꽃들은 대부분 살아가는 곳이 누군가에게 짓밟히거나 지나가는 차 바퀴에 깔릴 수도 있는 곳에 살다 보니 살아가기 위해 단단한 줄기로 무장했습니다. 무리 지어 살아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디풀은 돋보기로나 봐야 보이는 붉은색이나 하얀색을 가진 아주 작은 꽃이 피는데, 사실상은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 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진에서 보다시피 정말 볼품없는 꽃이지만, 전혀 열등하거나 꽃의 역할을 전혀 못 하는 건 아닙니다. 작은 꽃은 양성화(兩性花)로서 꽃 하나만으로도 후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더 다양한 유전자를 가진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다른 개체와의 수정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양성을 확보하지 못하면 점점 유전자 존속을 위한 힘이 사라져 결국에는 멸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식물들은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만들어 곤충이나 바람 등을 이용한 수분을 합니다.

     

그러나 외부 매체에 의해서 수분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태가 되면 자가수분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경우도 있습니다. 식물은 그럴 때를 대비하여 미리 장치를 마련해 두기도 합니다. 마디풀이 양성화를 만들어 놓은 것은, 꽃이 너무 작아 벌 나비들이 찾기 어려워 개미와 같은 작은 곤충들에 수분을 의지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를 대비하여 마디풀은 양성화라는 비상장치를 마련한 것입니다. 식물들은 아주 현명하고 지혜롭습니다. 저 숨쉬기조차 열악한 환경에서도 생존을 위한 지혜를 가진 식물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디풀은 도대체 생명의 기능을 수행할 것 같지 않은 작은 꽃이 피면서도 충분히 생명의 기능을 감당하는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러하지 않을까요? 마음속에 조금 작은 꿈과 소망이 가지고 있더라도 충분히 그것만으로도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아주 작은 행복만으로도 우리의 삶을 충분히 영위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아름다움을 우리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건 아닌가요.

         

마디풀 같은 잡초는 발로 밟히면 더욱 잘 사는 풀입니다. 이 풀꽃은 오히려 밟아 주어야 잘 자라고 후손을 잘 만들어 냅니다. 사람이나 자동차 바퀴에 밟힐 수 있는 위험하고 척박한 곳에서 자라는 이 풀꽃은 줄기가 단단하고 질겨, 밟히면 줄기가 땅에 닿아 거기에 다시 뿌리를 내리고 더 많은 줄기를 만들어 뻗어나갑니다.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온몸에 상처투성이지만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그 숙명을 이겨내는 지혜를 가진 풀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질긴 생명을 이어서 작고 귀여운 꽃을 피우는 마디풀의 삶을 바라봅니다.

         

갈라진 콘크리트길 틈에서 담배꽁초와 함께 살아가는 마디풀


사람 말고 누구도

이따위 곳이라고 하지 않는다.

 - 이영광, <이 따위 곳> 부분   

       

요즘과 같은 세상에서 살면서 남에게 밟히거나 억눌리면 가만히 있을 사람 없겠지요. 온몸에 상처투성이가 되도록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서 참고 살아가는 바보는 없겠지요. 아마 우리는 벌써 “이따위 곳에 왜 나를 낳아놓은 거야?” 하고 불만 가득한 말을 쏟아내며 원망하겠지요. 요즈음 흔히 얘기하는 흙수저로 태어난 젊은이나 학생들이 불만과 격정에 차서 “왜 이따위 세상에 날 낳아놓은 거야’ 하고 부모를 원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마디풀에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마디풀의 지혜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영광은 같은 시에서 “사람 말고 누구도 이따위 곳이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잡초와 다름없는, 아무 데도 쓸모가 없을 것 같은 마디풀도 자신이 태어난 곳을 이따위 곳이라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역경을 이겨내는 지혜를 발휘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갑니다.

     


뱅상 퀴에프의 <라틴어 편지>에 보면 ‘템포리 세르위레(Tempori servire)’ 라는 라틴 격언이 나옵니다.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라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일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주어진 환경에 대하여 적응하고 그 상태를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습니다. 환경을 수용하지 않으면 경직되고 불안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주어진 상황과 변화를 받아들이고 삶의 흐름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풀꽃들은 어디에선가 싹을 틔울 때 결코 자신이 떨어진 곳과 바깥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본성에 따라 그곳에서 싹을 틔우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갑니다. 외부환경이 아무리 험하고 거칠더라도 꿋꿋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씨를 맺습니다. ‘왜 이따위 곳에 나를 데려다 놓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한탄하거나 속상해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살아갑니다. 자신만의 방식대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영광 시인의 말처럼 사람만이 자신이 사는 곳을 ‘이따위 곳’이라고 폄훼합니다.           


“생명이기에, 생명이 지닌 모든 속성과 생명이 겪는 모든 사건을 안고 꼿꼿이 살아가는 식물이 아름답다.”

 - 최문형, <식물처럼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