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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배 Nov 01. 2022

인동덩굴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려는 의지

                    

제가 과연 겨울의 매운 추위를 이겨내고 찬바람 맞으며 밖으로 나가 산책이나 운동을 할 수 있을까요?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안 됩니다. 저는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떠안은 안면 통증으로 인해 찬바람을 맞으면 아파서 견딜 수 없습니다. 사람의 참을성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요? 모든 고통을 인내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심정을 토로할 때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말입니다. 그런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압니다.


흔히 ‘좋은 글’이라고 해서 블로그나 SNS, 혹은 메일로 받아보는 글이 있는데 대부분 ‘시련과 고통은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긍정적으로 참고 견디면 좋은 성과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글을 쓴 것을 읽으면서 저는 ‘이 글은 진정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의 글이구나.’, ‘좋은 글’이 아니라 ‘좋게 꾸며진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정 죽고 싶을 만큼 아픈 고통을 맛본 사람이라면 ‘고통이 없었으면 좋겠다.’, ‘제발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도 가질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너무나 큰 시련이 계속 닥쳐와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을 때 ‘제발 이 시련에서 벗어날 수만 있게만 해 주소서.’ 하고 기도밖에는 할 수 없을 때, 그 좋은 말들은 다 위선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인간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구약성경 <욥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진실한 사람인 ‘욥’이라는 사람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온갖 시련과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재산 상실은 물론 자식까지 죽게 되고 온몸이 병들게 되는 모진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강한 그는 끝까지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습니다. 결국에 하느님은 그에게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다시 주십니다. 처음에 저는 아무 잘못이 없는 욥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과 모든 것을 긍정하는 욥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욥의 용기와 진심, 믿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만큼 강한 믿음이 없습니다. 그런 시련과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때로 ‘저에게 왜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십니까?’ 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는 나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들처럼 식물도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됩니다. 저와 같이 그들에게도 겨울은 엄청난 고통이고 시련입니다. 살기 위해 잎사귀처럼 양분을 소실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가을에 다 떨어뜨리고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만 갖추고 겨울을 지내게 됩니다. 삶의 지혜죠. 저같이 겨울을 살기 어려운 사람은 식물이 겨울을 꼼짝 않고 지내듯이 저도 집안에 박혀 고통을 최소화합니다. 식물로부터 배운 지혜입니다. 식물 가운데 겨울을 이겨내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인동초(忍冬草)’라는 이름을 가진 덩굴식물입니다. ‘인동(忍冬)’이라. 듣기만 해도 부럽습니다. 겨울의 추위와 고통을 참고 이겨낸다는 뜻이니 참 대단하고 부럽기만 합니다. 사실 인동은 풀처럼 생겼고 이름에도 풀이라는 초(草)가 들어있지만, 풀이 아니라 나무이기에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인동덩굴이 나무라는 사실은 겨우 겉만 알게 된 것입니다. 더 깊이 내막을 찾아 들어가 볼까요? 인동덩굴의 잎사귀는 상록수들처럼 잎이 두껍지도 않으며 침엽수처럼 가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저렇게 가엽고 불쌍한 모습으로 줄기를 붙잡고 떨어지지 못한 채 억척스럽게 모진 추위를 견뎌내고 있을까요? 그 이유는 열매 때문입니다. 겨우내 떨어지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열매가 아니라면 에너지 소모가 큰 잎을 겨울에 매달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후손을 만들어 퍼뜨리려는 식물의 본능입니다. 살기 위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무조건 견디는 전략이지요. 자식이 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것이 우리 어머니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어머니는 자신이 아파도 참으며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려 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그러셨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고 억척스레 일하셨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주시려고 온몸과 맘을 다해 노력하셨습니다. 저는 인동을 ‘어머니의 꽃’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찌합니까? 도감을 찾아보니 인동덩굴이 돌담이나 바위를 안고 있는 모습이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스럽게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동덩굴의 꽃말은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인동덩굴은 아버지의 꽃이라고 합니다. 부득이 저는 원만하게 타협해서 인동덩굴이 ‘부모님의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날 오후 산책길에 멀리까지 갔습니다. 제가 걸어서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공원길입니다. 우리 동네 공원들은 죽 이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여기부터는 무슨 공원, 저기서부터는 무슨 공원 이런 식으로 팻말을 붙여 구분합니다. 야트막한 산속에 정자도 있고, 놀이터도 있고, 도로 위를 건너는 다리를 넘어 또 다른 정자와 숲속 길도 있고, 곳곳에 운동기구도 설치돼 있기도 합니다. 숲속 길을 가다가 문득 바닥에 입을 크게 짝 벌리고 ‘제발 저를 봐주세요!’하고 큰소리로 외치고 있는 흰 꽃 두 송이를 보았습니다. 덩굴줄기인데 타고 올라갈 것이 없어 바닥을 기어서 다른 풀들 사이로 주둥이를 내밀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정겨운지 홀딱 빠져서 헤어나오질 못했습니다. 사진을 보세요. 보자마자 금세 빠져들고 말 겁니다. 자기를 보아달라고 질러대는 소리가 들리시나요? 저는 이 꽃을 본 뒤로 한참 동안 인동덩굴꽃이 SNS에서 제 얼굴을 대신했습니다. 건강과 많은 친구를 잃고 집안에 갇혀 사는 제 모습만 같았습니다.

                    

노주인의 장벽(腸壁)에

무시로 인동(忍冬) 삼긴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지어

무가 순돋아 파릇하고,     

흙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 정지용, <인동차(忍冬茶)> 전문

              

<인동차>가 실려있는 정지용의 시집『백록담』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의 <인동차>라는 시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인동덩굴은 겨울에도 푸른 잎이 떨구지 않는 풀 같은 나무입니다. 여름에 노랗게 변한 꽃을 응달에서 말렸다가 두고두고 내내 꽃차로 마시기도 하지만, 눈 내리는 한겨울을 버텨낸 잎을 우려먹는 인동차도 있습니다. 이 시에서 한겨울에 저장해 둔 겨울 무에 파릇한 순이 돋고, 자작나무 덩그럭(타다 만) 불이 도로 붉게 타고 있습니다. 안에서는 흙냄새도 훈훈하지만, 바깥의 풍설(風雪) 소리에 귀 기울이는 노 주인은 봄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삼동이 겨울의 절정이라면 곧 겨울은 지나갈 것이라는 예고이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모티프는 인동차를 마시는 것입니다. 인동차를 마시며 겨울을 이겨내는 것입니다. 겨울이라는 시련과 고통의 시간을 인내하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식물과 인간에게 겨울은 삶과 죽음의 기로입니다. 겨울이라는 시련과 고통의 계절을 견디지 못한다면 식물이나 인간은 결국 죽고 말 것입니다.


잎으로 만든 인동차는 그 맛과 빛깔이 녹차와 비슷하며 녹차에 섞어 마시기도 합니다. 인동꽃과 산사나무 열매를 반씩 물로 달여 섞어 마시면 산사의 신맛이 더하여 먹기가 더 좋다고 합니다. 인동꽃차를 마시려면 노랗게 변한 향기가 남아있는 꽃을 따다가 그늘에서 말려 뜨거운 물로 우려서 마시면 됩니다. 그 향기가 재스민차에 못지않고 아주 풍치가 있다고 하니 이번 겨울에는 인동차를 마시며 겨울을 나시면 어떨까요.

           

인동덩굴(왼쪽), 붉은인동(가운데). 홍괴불나무(오른쪽)


약초 관련 정보를 찾아보면 인동덩굴은 줄기, 잎, 꽃, 뿌리까지 약으로 쓰여 버릴 것이 전혀 없고 맛과 향이 고급스럽고 단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인동덩굴을 흔히 약재로 부를 때는 금은화(金銀花)라고 부릅니다. 처음에 꽃이 필 때는 흰색이었다가 조금 지나면 노랗게 변하고 나중에 시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금색과 은색 꽃이 합께 피어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붉은인동도 있는데 처음에는 붉은색으로 피다가 나중에 노란색으로 변하여 시드는 것이 똑같습니다. 홍괴불나무의 꽃이 붉은인동꽃과 흡사하여 자세히 보아야만 알 수 있습니다. 붉은인동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유럽 원산의 인동 종류입니다. 우리나라에 미국실새삼이나 돼지풀과 같은 외래식물이 들어와 생태계를 교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인동이 미국으로 건너가 왕성하게 번져 나가 골치가 아플 정도로 번식하고 있다고 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에만 외국 식물이 들어와 생태계를 교란하는 줄 알았는데 우리 식물도 외국에 가서 그쪽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왜 저는 이상하게 기분이 뿌듯하게 느껴질까요. 제가 국수주의자라 그럴까요?  

   

무령왕비금제관식(국보 제 158호, 국립중앙박물관)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 로마, 중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인동덩굴이 좋은 조짐을 알려 주고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어 귀족들이 사용하는 집과 도자기나 많은 공예품에 장식용 문양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산기슭 가시덤불 언 땅 뚫어

맨발로 꽃 수를 놓는다

무딘 한파에 야윈 몸

햇살 향한 고고한 일편단심

뻐꾸기 울던 날 슬픈 사연 승화된

한삼 자락 넝쿨 올리어 유독 왼쪽으로만

휘감기는 가련한 사랑의 서약

금화 은화 의좋은 자매

뿌리내린 인동초이라네

 - 김옥순, <인동초> 전문

         

김옥순의 <인동초>라는 시에서 인동덩굴에 얽힌 이야기가 나옵니다. 금화와 은화 두 자매에 관한 설화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이 꽃이 처음에 필 때 흰색이었다가 노랗게 변하기 때문에 약재로는 금은화(金銀花)라 부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군요. 덩굴식물마다 감고 올라가는 방향이 다르다고 합니다. 인동덩굴은 왼쪽으로만 휘감고 간다는군요. 나팔꽃은 반대 방향인 오른쪽으로 휘감고 올라갑니다. 습관인지 본성인지 이런 것은 참 바꾸기 어렵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나 고집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 부부는 말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싸웁니다. 바로 고집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것을 서로에게 더 많이 주려고 옥신각신합니다. 서로 더 먹으라고 주다가 음식점에서 싸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싸우는 것은 다 제 고집과 본능 때문입니다. 이런 것도 고쳐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김옥순의 <인동초>에 나오는 금화 은화 의좋은 자매 이야기를 찾아보겠습니다. 옛날 어느 부부가 쌍둥이를 았다고 합니다. 부부는 두 딸의 이름을 지었는데 언니는 금화(金花), 동생은 은화(銀花)라 했습니다. 금화와 은화는 의좋은 자매로 잘 자라 시집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자매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시집을 가지 않겠노라고 고집을 피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인 금화가 열이 심하게 나고 온몸이 온통 붉게 변했습니다. 의원을 급히 불렀지만 ‘열병에 결려 치료 약이 없다.’라는 대답뿐이었습니다. 동생인 은화는 언니 옆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간호했지만 결국에 언니 금화는 치료다운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며칠 뒤 동생 은화도 언니를 따라 열병을 앓고 죽게 되었습니다. 은화는 부모에게 "저희 자매는 죽어서라도 열병을 치료할 수 있는 약초가 되겠습니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1년 뒤 자매가 묻힌 무덤가에 이름 모를 덩굴이 뻗어 나와 꽃을 피웠는데 그 꽃이 처음 필 때는 흰색이었다가 점점 노란색으로 변하였습니다. 마을에 두 자매에게 걸렸던 것과 같은 열병이 전염병으로 돌았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꽃을 달여 먹고 열병에서 낫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마을 사람들은 이 꽃을 '금화(金花)'와 '은화(銀花)', 두 자매의 이름을 합해서 '금은화(金銀花)'라고 이름을 지어 불렀다고 합니다. 그럴듯한 이야기지요? 이런 꽃에 관한 설화나 전설을 찾다보면 우리 선조들이 참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지금 제가 겪고 있는 통증은 아무런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의사는 그냥 고통을 받아들이고 살라 합니다. 그냥 참고 살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중간에도 엄청난 통증으로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 쥐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인동꽃을 보며 다시 한번 자연은 스스로 관리하고 자정(自淨)하며 시련을 이겨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인간보다 훨씬 지혜롭고 다양한 효율적인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동은 겨울이라는 시련과 고통을 아무런 장치 없이 무조건 버티어내는 것을 보면서 저도 지금 제게 주어진 고통을 무작정 참아낼 작정입니다. 그러면 또 새로운 삶이 살아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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