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순간.
아끼는 동료가 오늘 내가 행복하면 좋겠다며, 본인이 좋아하는 문학평론가의 글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았다.
"한 사람에겐 몇 명의 다른 사람이 필요할까요?"
나는 흥미롭게 글을 정독했다.
이 글의 전문을 첨부하고 싶지만, 출처를 알 수 없어 못올리는것이 너무 아쉽다.
내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 몇가지를 기록해본다.
육아는 혼자서 할 때와 둘이 할 때, 하늘과 땅만큼 다른 일이 됩니다. 둘일 때 수월한 건 단지 노동이 분담돼서가 아닙니다. 내 수고를 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입니다.
혼자서 육아를 하는 것이 우울하고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나에게 위로가 되는 문장이었다.
지난 한달, 혼자서 육아를 하며 알게 모르는 우울감이 찾아왔다.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고, 아이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모두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육아가 안맞다고 느끼는 것 또한 죄책감으로 다가왔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였다. 아이는 너무 이쁘지만 그 시간은 나에게 힘들었다.
그런 나에게 저 문장은 "너만 그런게 아니야" 라는 위로를 해주었다.
역시 남편의 출산휴가는 잘한 선택이었다.
'슬픔은 나누면 반? 아니면 두 배?' 제 답은 '슬픔은 나누면 제값이 된다'입니다. 0.5나 2가 되는 게 아니라 1이 된다는 것. 본래 슬픔은 1.5입니다. 슬픔의 원인 때문에 1만 큼 슬픈데, 남들은 행복해 보여서, 고립감 때문에 0.5가 추가되니까요. 근데 슬픔을 나누면 원인이 해 결되진 않아도 불순물 같은 외로움(0.5)이 덜어질 순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1이 됩니다
우리는 흔히 슬픈일이 있을때 공감을 바라며 공유한다.
나는 슬픈일을 해결해줄 수 없는데 왜 공유하지?라는 생각을 가진 극T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이 글을 보니 깨닫게 되었다.
슬픔은 애초에 1.5의 값이었다. 나누면 1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누는 것이 이득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슬픔을 나눌때 0.5를 가져가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큰 울림을 준 시도 남겨본다.
시인 조온윤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한 사람에게는 세 사람이 필요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장 사랑하는 자기 자신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그러지 않으면 자신에게 남은 부드러운 빵을
누구에게 주고 싶은지
구별할 수 없을 테니까
빵의 부드러움을 모르는 한 사람에게도
그들은 꼭 셋이어야 했다
세 사람이라면
한 사람이 함께 있지 않아도
외롭지 않을 두 사람을
생각할 수 있을거였다.
'문화평론가의 글'
왜 한 사람에겐 두 사람이 필요한가, 즉 왜 인간은 셋이어야 하는가. 시인은 두 가지 관점을 제시했습 니다. 셋이어야 내가 누굴 사랑하는지 알 수 있다는 것, 또 셋이어야 내가 없어도 괜찮다고 여길 수 있 다는 것. 전자는 자기를 중심에 놓는 계산법, 후자는 자기를 빼면서 하는 계산법입니다. 예컨대 부모님 과 함께 걸을 때 당신은 어느 쪽인가요.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고 또 부모님 중 한 분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에 아파하는 쪽인가요, 아니면 내가 멀리 떠나 거나 심지어 사라져도 될 정도로 두 분이 서로 애틋 하니 다행이라 여기며 안도하는 쪽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관점인가.
이 글을 보고 아린이가 태어난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셋 이어야 하는 이유, 셋 이라서 다행이다.
아린이와 남편과 셋이 살아갈 나에게 너무 좋은 응원이 되는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