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재저 킴 Feb 12. 2023

캐나다에서 뺑소니 당하면

지난 화요일 부슬비 내리는 아침,

매일 같은 시각, 같은 경로를 통해 출근하는 나의 일상에 예상치 못 한 사건이 일어났다.


'끼이이이익......쿵!'


도로가 찢어질 듯한 타이어 마찰음이 들려오더니 이내 쿵 하며 충격이 전해져 온다.

빨간 신호등에 정차돼 있는 나의 차를 누군가 뒤에서 받아 버린 것이다. 

이렇게 작은 도로에서 저런 속도로 달려와 가만히 서있는 차를 받아버리다니... 아무래도 상대방은 운전 중 휴대폰을 사용했거나 졸음운전을 했거나 가속 페달에서 브레이크 페달로 발을 옮길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사색에 잠겨있었던 모양이었다.


캐나다에서 차 사고는 처음이라 나도 적잖이 당황했지만 일단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렸다. 

다행히도 큰 사고는 아니었다. 뒷 범퍼가 슬쩍 찌그러지고 뒷 차의 빨간색 페이트가 묻어있었다. 상대방의 차도 앞 범퍼가 약간 찌그러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생각하며 사고 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내 차에는 그 흔한 대시캠도 설치되어있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사고 현장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사진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는 동안 뒷 차에서도 운전자가 내렸다. 아프리카계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이 여성분 차에서 내리자마자 다짜고짜 울음을 터뜨린다. 아니, 받친 건 나인데 왜 상대방이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괜찮냐고 물었다. 그러자 돌아오는 말, 


"It is nothing, we don't even need to report this, it's nothing..."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이거 신고할 필요도 없겠어, 암것도 아니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차에 받히고도 괜찮냐고 물어오는 피해 차량 운전자에게 참으로 건넬 수 없는 대사였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It is not nothing, you hit my car and I need to report this to ICBC (ICBC는 주정부 보험사). Your liscense please.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고, 당신은 내 차를 박았어요, 보험사에 보고 해야 됩니다. 면허증 주세요."


그 여성은 조금 망설이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후진으로 차를 빼더니 사고 현장을 가로질러 그대로 도주하는 것이었다!

내 두 눈앞으로 내 차를 박고 내빼는 그녀의 빨간색 차가 쌩 하고 지나가 버렸다.


충격과 공포였다. 

이것은 말로만 듣던 차 사고 뺑소니......!?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차 문을 열어둔 채 비를 맞으며 홀로 도로 위에 서있었다. 방금 이 편에 도착해 사정을 모르는 뒷 차가 빵빵거리는 걸 듣고 정신을 차렸다. 마냥 도로 위에 서있을 수도 없고 일단 다시 차에 타고 회사로 향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회사로 가는 동안에도 이 당황스러운 사건에 정신이 몽롱했다. 

내 안색을 보고 다들 무슨 일이 있어서 늦었음을 눈치챈 회사 동료들에게 사고 내용을 말해주었더니 어서 빨리 경찰과 보험사에 알리라고 한다. '그래, 경찰과 보험사에 알려야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사고 현장에선 머리에 떠오르지도 않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사고 지점과 내용을 간단히 메모하여 경찰에 전화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hit and run, 뺑소니 신고 접수를 했다.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말투로 사고 내용을 묻던 경찰 아저씨가 내 이야기를 다 듣더니만 이건 hit and run 케이스가 아니란다. 상대방이 차에서 내려 나와 한마디라도 나누었다면 뺑소니가 아니란다. 이런 경우는 '사고 후 미조치'  혹은 '사고 현장 이탈' (fail to remain at the scene of an accident)로 들어간다고 한다.

대시캠 자료 가 있냐고 물어서 없다니깐 뭔가 '별 수 없구먼...' 하는 말투로 조사하는데 며칠이 걸릴 테니 보험사에 연락하고 일단 기다리라고 한다.


이번에는 보험사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캐나다 BC주는 ICBC(Insurance Corporation of British Columbia)라는 주정부 법인 보험사가 단 하나 존재한다. 말 그대로 차량 보험 관련 완전한 독점을 하고 있는 보험사이다. 그래서 그런 건지, 보험료도 한국의 2배 이상으로 매우 비싸다.

보험사 직원은 경찰 아저씨보다 더 건조한 말투를 구사했고 그 안에는 어떠한 인간의 감정도 깃들여지지 않는 듯했다. 크롬 금속으로 이루어진 몸에 남색 수트를 걸치고 자지도 먹지도 않으며 24시간 사고에 대해서 보고만 받는 로봇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요즘 나오는 AI 스피커조차도 스스로 인간의 감정에 대해 교육받고 훈련하여 친근한 대화 음성을 제공한다는데 이 분은 그런 교육은 들어본 적도 없는 거 같았다. 


대화의 압권은 "Are you bleeding now?" 하고 묻는 보험사 직원의 질문이었다. 

"당신은 지금 피 흘리고 있습니까?"

여태껏 사고 내용에 대해 묻고 답하며 나의 상태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뭔가 매뉴얼대로 불쑥 튀어나온 이 질문 자체도 우습지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피 흘리고 있냐고 이토록 감정 없이 물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나도 바로 "nope" 하고 짧게 대답하긴 했지만  "Yes, I'm bleeding now."라고 답했다 해도 달라질 건 없이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어쨌든 ICBC의 결론은 이렇다.

목격자나 대시캠 자료등으로 사고 증명이 되지 않으면 사고를 낸 당사자가 신고하지 않는 이상, 보험 처리 기간은 한없이 길어질 수 있단다. 단 이번 건은 경미한 사고로 분류되어, 상대방의 신고 없이 차 수리비 $1,000 안에서 바로 보상, 카이로프래틱, 마사지, 한의원 등 회복 치료 비용은 12주 동안 금액 상관없이 12번 보험 처리해준다고 한다. 사고를 낸 차량에 대해서는 사진 찍어 둔 번호판을 근거로 조사하고 추적해서 사고에 대한 답변을 얻어낼 것이라고는 하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사고에 대한 모든 리포트가 끝났다.

긴장이 풀리면서 왠지 허리와 목 부근에 뻐근함이 느껴진다. 병원에 들러야겠다.

하지만 출근했으니 일은 해야 한다. 오늘은 일하자.




집으로 돌아오는 퇴근길, 

아침에 사고를 당한 그 도로를 지나며 무언가 서글퍼졌다.

차를 박아놓고 유유히 도망가던 그 여성분이나 무뚝뚝한 경찰 아저씨와 로봇 보험사 직원까지 한국에서라면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된 것만 같아 왠지 서러워졌다. 


나의 고국, 한국에서는 접촉 사고 났을 때 보험사에 전화하면 10분 내로 세상 친절한 보험사 직원이 달려와 모든 처리를 도맡아 해 주었는데, 여기 캐나다는 사고 처리도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 참 난감하다. 


'혹시 내가 영어를 잘 못해서 사고 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 한건 아닐까?' 


'받을 수 있는 보험 혜택이 더 있는데 잘 못 알아들은 건 아닐까?' 


언제나 난처한 일을 당할 때마다 따라붙는 이민자의 언어 열등감은 덤이다. 


어쩌면,

사고가 크지 않았음에 감사해야 하는 게 맞는데 

사고 증명을 제대로 할 수 없어도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게 맞는데

곁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음에 감사해야 하는 게 맞는데


집에 돌아와 환율까지 따져가며 한국보다 대시캠을 비싸게 파네 어쩌네 하고 있는 나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감사하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