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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저 킴 Aug 06. 2023

회사로부터 칼을 선물 받다

이것이 스위스의 전통입니까?

현 직장, 입사 2년 차다.

여느 때와 같은 월요일.


나의 직속 상사가 손바닥을 위로 둔 체 검지와 중지를 까딱까딱 움직여 오피스로 나를 부른다. 

여기서는 별 문제될 것 없는 저 손동작이 여태 거슬리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나는 이방인이 맞는 듯하다.


가끔씩은 이렇게 아침에 그의 오피스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꼭 업무 관련 이야기가 아니어도 크고 작은 잡담을 나누며 관계를 형성해 나아가는 것이 나름 그만의 직원 관리 방식인 것 같지만 내게 있어 상사와의 스몰 토크는 적잖이 불편한 것이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사실 내가 그로부터 듣고 싶은 대답이 있었다.


1년 가까이 함께 해온 장기 프로젝트 막바지 단계에서 나는 2주 전 갑작스레 빠지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다른 팀의 시니어 리드핸드가 들어오게 되었고 나는 공식적으로 어떠한 이유도 설명 듣지 못했다. 그 사건에 대한 가십과 루머들은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나에게도 흘러 들어왔고 '나가리' 되어버린 사건 자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주변에 감도는 그 어색한 공기들이 나를 더 괴롭게 했다.

 

묵묵부답 내 상사로부터 어떠한 말도 들을 수 없었던 나는 며칠 전 나의 포지션이 바뀐 이유와 앞으로 회사에서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고 정중하게 이메일을 보냈다. 오늘 아침의 미팅은 나의 요청에 의한 것이고 내 질문에 답하기 위함 이리라.


그와 함께 본론에 들어가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서로의 주말 일과를 묻는 것으로 시작된 미팅은 회사 내 에어컨 온도에 대한 토론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잠시 대화가 끊겼을 때 그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데스크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손바닥 만한 나무상자를 꺼내 내 앞에 올려놓는다.


이게 무엇이냐는 내 질문에 그저 파란 눈을 반짝이며 열어보라 한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슬쩍 상자를 열어보니 무언가 빨갛게 예쁜 것이 종이에 쌓여있다.

자세히 보니 아, 이것은 스위스 군용 나이프다 흔히 한국에서 맥가이버 칼로 불리는 그것.

근데 영문을 모르겠다. 아침부터 다짜고짜 군용 칼을 꺼내서 어쩌자는 건지.


어리둥절한 나를 보며 '우리 회사 온 지 2주년 기념으로 주는 선물이네'라고 답한다.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스위스에 본사를 두고 주로 로프웨이를 이용한 탈 것 (주로 케이블카, 리프트, 산업용 엘리베이터)등을 제조하고 있다. 100년 전 알프스에서 첫 번째 케이블 카를 만든 게 시작이란다.

나의 직속 상사는 자뭇 진지하게,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선물로 칼을 건네는 것은 스위스의 전통이라며 믿음의 상징을 받게 되어 축하한다고 말한다.


스위스 현지인인 듯 자랑스럽게 그 나라의 전통을 들먹이며 장황한 말들을 늘어놓는 그를 보며,

(이 사람, 캐나다 비씨 주 토박이다. 언제 한번 점심 같이 먹을 때 캐나다 식 '라떼는 말이야'를 통해 그의 고향 사랑을 한 시간 동안 들은 적 있다) 이런 설명도 회사 매뉴얼에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역시 스위스 하면 이 칼이지~ 그렇지 않은가?'


속으로 스위스 하면 역시 시계 아닌가? 생각하며 기계식 명품 시계의 부품들을 한 땀 한 땀 세공하고 있는 제네바 장인의 손을 떠올렸지만 그의 질문에는 맞다고 대답했다.


그가 계속 말했다. 그동안 프로젝트를 위해 수고해 주어서 고맙고 항상 그래왔듯 협력하는 태도로 다른 일도 맡아준다면 회사에 더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그럼 이제 여기 싸인하고 가 봐, 월요일은 항상 긴 하루잖아, 안 그래? 허허허'


하아... 이게 다 인가?  

이 사건을 이렇게 어물쩡 넘어가려는 그에게 화가 났지만 뭐 어쩔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입사 2년 선물을 받았다는 것에 확인 서명을 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9명으로 구성돼있던 프로젝트 팀 멤버들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백인이었다. 

물론 내 자리를 대신하게 된 멤버도 백인이다.

누구는 장기 프로젝트는 오직 백인 시니어들의 영역이라고 했고

누구는 나의 영어가 팀에서 제외된 원인이라고 했다.  


나는 모른다. 내가 왜 나가리 되었는지

그저 지난 1년간 마음을 쏟아부어 해 오던 일을 아무런 보상도 없이 하루아침에 다른 이에게 맡겨야 한다는 것과 그 변화에 대한 납득할 만한 이유를 듣지 못한다는 것이 분할뿐이다.


스위스군의 상징, 방패 안의 흰 십자가

회사 로고 

내 영문이름 


이 모두가 새겨져 있는 칼을 보니 기분이 참 묘하다. 왠지 모르게 군대 전역날 이 떠오른다. 

대한민국 육군 병장 전역 신고를 마치고 KTX를 타고 올라와 서울역에서 들이켰던 카프리 병맥주의 그 상쾌함을 기억한다.


결국 나는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건넨다는 이 칼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이 회사에서 나가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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