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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뚭씌 Oct 16. 2023

<신체 강탈자의 침입>(1956) 돈 시겔

별점: ★★★★☆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보면서 미장센이 참 ‘회화적’이라고 생각하였다. 닥터 마일즈 베넬(케빈 맥카시)와 벡키(데이너 윈터)가 잭(킹 도노반)의 복제 인간을 마주하는 장면은 꼭 화가 렘브란트의 ‘튈프 교수의 해부학 강의’를 보는 듯했다. 또한, 베넬의 독백이 ‘풀샷’에서 흘러나오는 장면은 꼭 연극을 보는 듯하였다. 대개 독백이 나오는 경우, 인물의 심리에 집중시키기 위하여 클로즈업으로 피사체를 담기에, 베넬의 독백 샷은 내게 굉장히 특이하게 느껴졌다.


이 영화가 상영된 시기가 ‘냉전’임을 고려했을 때, 영화에 등장하는 ‘신체 강탈자들’은 소련의 전체주의를 떠올리게 하였다. ‘명령이 떨어져 광장에 모여든 사람들’과 ‘베넬과 벡키의 신체를 강탈하라는 명령에 그대로 순응하는 모습’에서 소련의 전체주의를 연상케 하였다. 최정민 저자는 감독 돈 시겔이 비판하는 이가 공산주의자들이 아닌 영화 제작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해석이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1] 1950년대 미국은 획일주의 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맥카시 선풍, 냉전 시대의 핵에 대한 공포, 미국의 체제 전복에 대한 불안 등 정치적 편집증이 있었다. 강력한 전염성을 가진 종자는 지구로 침투한 외계인으로 전치되었지만, 이 종자는 언제 우리를 잠식시킬지 모르는 포자이며 바이러스인 공산주의이다. 나조차도 이 영화를 보며 소련의 전체주의를 떠올렸으니, 최정민 저자와 같이 이 영화는 반영론적 관점에 의해 그 의미가 제한되었다는 부분에서 아쉬움이 있다.



그렇다면 레드 콤플렉스(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적 해석에서 벗어나 다른 관점으로 영화를 바라볼 수는 없을까? 영화 속 디테일한 설정 하나하나에 집중해보는 것이 그 방법일지 모른다. 영화 속에서 신체 강탈자가 태어나는 곳은 마치 ‘번데기’의 형상 같다. ‘번데기’란 표준국어대사전에 ‘겉보기에는 휴식 상태 같지만, 애벌레의 기관과 조직이 성충의 구조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라고 정의되어 있다. 번데기의 정의에 주목했을 때, “완전히 제 형태를 갖추기 전까진 아무런 위험도 없어”라고 말하는 베넬은 그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판단을 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후에, 번데기에서 변태하는 자신의 형상을 찌르고, 영화 속에서 가장 늦게까지 신체 강탈자에게 잠식당하지 않으며 잠에서 깨어 있는 인물이 된다.


영화 속 번데기에서 나온 나비는 처음에 그 형체가 확실하지 않다. 눈, 코, 입도, 지문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같은 형태로 복제되어, ‘사랑, 감정, 욕망, 야망, 진실’이 없는, 생존 본능만 남아 있는 상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나비가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나비’가 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이 지점이다. ‘나비’는 서양 문화에서 부활과 변신, 죽음과 영혼, 자기(개성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에서 ‘나비’는 육체로부터 자유를 얻음을 상징한다.[1] 집단 무의식에 주목한 융은 나비가 진정한 자기를 상징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한번 죽고 재탄생하여, 자기실현을 한, 완숙과 유의 상징인 나비가 이 영화 속에서는 생존 본능만 남아 껍질로만 존재하는, 오히려 바이러스의 숙주와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가 집단적 무의식의 상징을 비틀어버린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다.



또한, 번데기에서 신체 강탈자로 재탄생하는 모습에도 주목할 만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육체가 표상하는 것들은 가부장제에 대해서 ‘위협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거나 ‘부정적’인 것으로 규정된다.[1] 〈신체 강탈자의 침입〉에 나온 번데기의 형상은 자궁의 성질과 굉장히 유사하다. 신체 강탈자가 지구인의 모습을 발현시키기 이전까지 번데기 속에서 인간의 형체로 복제된다. 또한, 번데기 속에서 신체 강탈자(외계인)가 나오는 모습은 출산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번데기라는 짧은 터널을 지나, 번데기를 벌리고 밖으로 나오는 것은 물리적 육체를 다시 쓰는 비인간 즉, 신체 강탈자이다. 재탄생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거품과 물은 양수를 떠올리게 하는 원지적이자 비체적 이미지이다. 혐오스러운 동시에 매혹적인 형상이 여성의 육체와 섹슈얼리티를 자연적, 성적, 재생산적으로 약호화되고, 젠더의 경계가 유지되는 동시에 권력관계가 재조직화되었다. 번데기에서 태어난 이들은 영화 속에서 샌프란시스코를 누비며, 종자를 퍼트려 그 도시를 감염시키고 지배한다. 기존의 질서를 위협하는 존재인 셈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벡키는 트럭에 부딪힐 위기에 처한 개를 보고 불인인지심을 드러낸다. 이에 반해 비인간인 신체 강탈자들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것은 ‘인간성’인 듯하다.[2]


1950년, 많은 미국인은 이 영화를 보고 현실에 내재하는 공포를 현실 바깥(스크린 속)으로 몰아내며 안도감을 얻었으리라[3] 생각한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을 냉전 시대의 대표적 영화로도 살펴보았지만, 이 글에서는 작품 자체에 집중하는 관점으로 바라보고자 하였다. 이 영화는 집단적 무의식으로 드러나는 ‘나비’의 부활과 자기실현의 상징을 비틀었다. 또한, 번데기의 형상에서 느껴지는 ‘여성 섹슈얼리티와 육체의 표상’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신체 강탈’의 소재는 외부적 침입에 잠식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내가 익숙하게 느끼고 있던 것이 새롭게 다가오는 움 하임리히의 공포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 영화가 4편의 리메이크를 만들어내며, 50년 동안 재소환되는 데에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1] 최정민.(2010).냉전 이데올로기로부터 전염병의 서사까지.문학과영상,11(3),853-881.

[2] 윤복남. (2014). 상징‘나비’에 대한 고찰. 모래놀이상담연구, 10(2), 99-115.

[3] 주유신.(2002).불안과 거부의 징후들.한국언론학회 심포지움 및 세미나,(),47-63.

[4] 최진석.(2019).SF의 냉전적 상상력 - 미국과 소련의 체제경쟁과 문학전쟁 -.비교문화연구,55(),25-53.

[5] 이상욱(2020.02.25). 왜 포스트휴머니즘인가?. HORIZON

[6] 박진.(2007).공포 스릴러 영화에 나타난 선악과 신성(神性)의 문제.문학과영상,8(1),157-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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