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시지

영어맛 도시락 반찬

by 담는그릇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점심시간에는 여러 풍경이 겹쳐 있다. 도시락을 싸 오던 시간과 외부 급식이 들어오던 시간, 급식을 반에서 나눠 먹던 시간과 급식소에서 급식을 먹던 시간까지. 그래도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늘 도시락이다. 교실 한쪽에서 일제히 뚜껑이 열리고, 반찬 냄새가 잠깐 공기를 바꾸던 그 순간.


점심시간이 되면 우리는 각자의 도시락을 열었다. 엄마들마다 싸 주는 음식은 조금씩 달랐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차구슬이라는 친구가 늘 싸 오던 돈까스와, 그 옆에 따라오던 달콤한 소스 맛은 아직도 선명하다. 집에서 먹던 케첩과는 다른 맛이어서 더 특별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는 두 곳의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모여드는 학교였다. 이미 서로를 알고 있던 아이들과, 처음 얼굴을 마주한 아이들이 한 반에 섞였다. 그 사이에서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이름보다 도시락 반찬을 먼저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떠오르는 친구가 있다. 이름은 김진경이었나. 정확하지는 않다. 얼굴과 목소리는 선명한데, 이름은 먼저 희미해졌다. 나는 수학을 잘했고, 그 친구는 영어를 잘했다. 영어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늘 발음이 좋다며 그 친구에게 읽기를 시켰다. 교실에 울리던 또렷한 영어 발음은 이상하게도 점심시간의 반찬 냄새와 함께 기억에 남아 있다.


우리 엄마는 우엉조림과 김을 넣은 주먹밥을 자주 싸 주셨다. 나는 그 주먹밥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의외로 잘 먹었다. 엄마는 고기나 소시지, 햄 같은 반찬을 거의 넣어 주지 않았고, 멸치볶음이나 생선을 넣어 주는 날도 있었다. 보온통 맨 아래에 된장국이나 청국장이 들어 있는 날이면 괜히 도시락을 여는 손이 늦어지곤 했다.


그런 도시락들 사이에서 진경이의 반찬은 영어를 잘하던 진경이의 이미지와 함께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진경이는 소시지를 자주 싸 왔는데, 우리가 흔히 먹던 소시지가 아니라 미국 소시지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콘킹 소시지였던 것 같다. 진경이 어머니는 저걸 어디서 사셨을까, 어떻게 그런 걸 아셨을까 괜히 신기했던 기억도 난다.


콘킹 소시지는 고염과 저염으로 나뉜다. 고염은 돈육으로 만들어져 염통이 들어 있고 나트륨 함량도 조금 더 높다. 저염은 계육으로 만들어졌고 상대적으로 나트륨은 적지만, 그렇다고 덜 짠맛은 아니다. 어쨌든 미국 소시지는 한 입만 먹어도 혀가 먼저 반응할 만큼 몹시 짜다.


진경이의 소시지는 아마 삶아서 가져왔던 것 같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내가 떠올리는 맛은 분명하다. 짠 콘킹 소시지를 삶아 케첩에 찍어 먹던 맛. 짠맛 위에 케첩의 단맛이 얹히면서, 이상하게도 계속 손이 가던 맛이다.


주부가 된 지금도 나는 부대찌개를 끓일 때면 꼭 콘킹 소시지를 넣는다. 요즘 밖에서 파는 부대찌개에는 미국 소시지가 꼭 들어가지는 않는다. 특히 프랜차이즈일수록 더 그렇다. 사람들은 부대찌개를 먹을 때 소시지보다 햄, 그러니까 스팸에 집중하지만, 나는 스팸보다는 소시지에 더 관심이 간다.


부대찌개를 해 먹으려고 사 두었던 콘킹 소시지가 냉동실에 오래 있었다. 집 앞에 부대찌개를 잘하는 집이 있다 보니 집에서 직접 끓일 일이 줄어들었고, 그렇게 소시지는 일 년쯤 묵혀 두게 되었다.


어제는 문득 그 맛이 떠올라 냉동실을 열었다. 한참을 삶고, 케첩을 곁들이고, 고추기름을 직접 내 뜨끈한 순두부찌개도 함께 상에 올렸다. 그런데 소시지가 짜도 너무 짰다. 예전보다 입맛이 달라진 건지, 아니면 정말 더 짰던 건지. 아무래도 아주 푹 삶아 줘야 했나 보다.


그래도 순두부에 의지해 천천히 먹었다. 짠맛을 중화하듯, 기억도 함께 풀어졌다. 진경이도 떠올랐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아이가 있다면, 진경이는 영어를 더 가르칠까, 수학을 더 가르칠까.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간 간간이 싸보낸 남편을 위한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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