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뿔도 없는 뉴질랜드 아줌마가 위기에 맞서는 자세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매일 새벽 공사장으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그 누구보다 비참함을 느끼는 당사자는 내가 아니란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집에 앉아 찬란함이 오기를 기다리며 한숨만 쉬기에는 나는 아직 젊고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충분하다.
한국의 경단녀가 뉴질랜드로 건너와 한 푼이라도 벌어보겠다 호기롭게 나섰던 빵집의 아르바이트 생활을 씁쓸하게 마무리하며 다시는 한인사장의 업장에 발도 들여놓지 않겠다 다짐했건만 지금 나의 능력과 팬더믹의 쓰나미 앞에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몇 푼이라도 벌 수만 있다면 한인사장의 업장에라도 문을 두드려야 했다.
뉴질랜드도 코로나의 영향이 서서히 번지는 듯했다. 한국은 이미 마스크가 필수가 되었다는데 뉴질랜드는 아직 그 정도의 방역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세계의 코로나 환자 소식을 전하며 뉴질랜드 시민들에게 조심할 것을 권했다.
남편은 여전히 무거운 소방설비의 장비들과 파이프를 들며 온몸에 든 멍이 가시는 날이 없었고 안전모를 딱 맞게 쓸 수밖에 없는 공사현장의 특성상 이마에는 늘 짙은 자국이 남아있었다. 남편의 동상 걸린 발을 주무르고 하루빨리 발의 감각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나는 매일 남편에게 미안했다.
남편은 흙먼지, 쇠먼지, 페인트와 신나냄새, 온갖 소음과 진동을 온몸으로 맞으며 퇴근하고 돌아올 땐 3킬로씩은 빠진 듯 양 볼이 홀쭉해졌고 점점 말이 없어졌다.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미안해서 남편이 일을 나가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끊임없이 움직였고 집안을 괜히 서성였다.
뭐라도 해야 했다. 남편의 온몸에 피멍이 들고 손끝이 갈라져 피가 난다 해도 남편의 일은 언제나 최저시급이었고 네 식구가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지출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최저시급의 외벌이 외노자 가정은 날이 갈수록 마이너스였다.
어차피 코로나와 아이들의 등하교 문제로 제대로 된 일은 구할 수 없으니 파트타임 일이라도 구하기 위해 집 근처 식당과 카페 일을 알아보다 한인식당에 면접을 봤다.
식당 앞에 빨간색 스포츠카가 세워져 있는 한인식당이 인상적이었다. 규모가 꽤 큰 식당에는 한국 전통문화 소품과 옛것의 짙은 향기가 벤 항아리와 도자기, 오색부채, 닥종이 인형이 뽀얀 먼지를 가득 품고 있었다.
아직 식당이 문을 열기 전이라 당연히 손님은 없었다.
남자 사장님은 서글서글한 눈매로 웃으며 이미 룸 안에 있었던 여성을 밖으로 안내했고 곧이어 나를 룸 안으로 안내하며 짧은 면접을 보자 했다.
사장님: "서빙은 해보셨나요?"
나: "아뇨, 처음입니다. 하지만 손님을 응대하는 것에 자신 있습니다."
사장님: "좋네요. 저희 가게에 한국사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외국인이 더 많아요. 영어는 좀 하시나요?"
나: "간단한 의사소통은 당연히 가능합니다. 손님분들께서 세금문제나 정치얘기를 저에게 물어보시진 않으시죠?"
사장님: "하하, 그렇죠. 재밌고 친화력이 좋으신 분 같네요. 저희는 좀 오래 할 수 있는 분을 원하는데 어떠신가요?"
나: "집이 가까워요. 하지만 초등학생 아이 둘이 있어서 2시 40분까지만 가능합니다."
사장님: "일하실 수 있는 비자는 있으신 거죠?"
나: "네. 그럼요."
사장님은 일을 잘하면 영주권도 지원해 줄 수 있는 규모가 큰 식당이니 자기 일처럼 해줄 정직원을 뽑고자 했다. 점심서빙과 저녁서빙 일까지 모두하고 퇴근하면 10시쯤 될 텐데 나의 상황에는 맞지 않는 일이라 매우 아쉬웠다. 새벽에 출근하는 남편이 있어 아이들 등하교는 내가 담당해야 하고 초등학생 남매를 두고 저녁에 다시 나가 일을 하러 나갔다가 아이들이 잠을 자면 들어오는 시간이었기에 아예 맞지 않는 일이다 생각했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 마음을 접었던 그 식당에서 연락이 왔다.
"점심시간 파트타임 일하시는 건 가능합니까? 4~5시간 정도 될 것 같네요. 원래는 정직원을 구하려고 했어요. 이렇게 되면 파트타임을 점심, 저녁 두 분을 구해야 해서 저도 귀찮아지지만 march씨가 잘해 주실 것 같아 연락드렸네요. 물론 Trial 기간 동안 일을 잘해 주셔야만 가능한 거고요"
나는 연락을 받은 직후 Trial(파트타임 정식고용 전, 수습기간)을 위해 집을 나서 식당을 향했다.
빠른 걸음으로 길을 걷다 저 멀리 길가로 흘러 내려온 큰 돌이 보였다. 급한 마음에 돌을 피해 가려다 혹시 어르신들이나 아이들이 뛰어나오다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날 것 같아 가방을 길에 내려놓고 낑낑대며 구석 안으로 큰 돌을 밀어 넣었다.
내 손과 옷에 뭍은 흙을 툭툭 털고 다시 가방을 들고 식당으로 걷다 문득 그 돌에 대해 생각했다.
앞을 제대로 보지 않고 뛰어나왔다면 나도 걸려 넘어졌겠지.
돌이 앞에 있는지 모르고 가방 속에 물건을 찾거나 전화하느라 정신이 딴 데 있었다면 걸려 넘어졌을 수도.
그래, 큰 돌은 앞을 가로막아 넘어질 수 있는 걸림돌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돌을 위치에 잘 끼워 맞춘다면 딛고 지나갈 수 있는 또는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겠네.
가만히 있는 큰 돌은 변함이 없지만 사람이 생각하기에 따라 걸림돌이 될지, 디딤돌이 될지 달라지겠구나.
지금 우리 가정의 위기가, 지금의 현실이, 인생의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쓰이길 바란다.
참담한 이 시기가 인생의 자양분이 되어 꼭 찬란해지기를 바란다.
정식 고용된 파트타임도 아니면서 고작 Trial 하러 나가는 길에 돌 하나 보고 웅장한 바람까지 마음속으로 품고 있는 내가 웃기기도 하지만 이 마음마저 없다면 흔들리고 있는 내가 무너질까 봐.
무너짐이 싫어 쥐뿔도 없는 뉴질랜드 아줌마는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마음속 웅장함을 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