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불편한 경쟁
제시간에 맞춰 Trial을 하기로 한 식당의 문을 열었다. 당연히 손님이 없어야 할 시간인데 식당 유니폼을 입은 직원이 나를 빼꼼하게 쳐다본다. 내가 면접 본 날 룸에서 나왔던 분 같았다. 일단 인사는 했다. 나 말고 아르바이트하시는 분이 한 분 더 계시는구나 싶었다.
뉴질랜드에서 아르바이트 경험은 한번뿐이지만 한국 식당에서 점심시간 파트타이머를 배수로 뽑아 경쟁시키는 구조는 처음 봤다. 들어본 적도 없다.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당황했지만 나이 어린 워홀러도 고개를 갸우뚱하며 황당하다는 눈빛이었다.
유니폼을 갈아입을 수 있다는 곳으로 안내받아 들어간 곳은 식당 부엌 안으로 들어가 오른쪽에 위치한 깜깜한 작은 방으로 수많은 소쿠리와 식자재가 쌓여있어 사람하나 겨우 서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누가 입다 벗어놓은 건지 모를 꿉꿉하고 찝찝한 유니폼을 입으려니 한숨이 나왔다. 유니폼의 깃이 내 목에 닿을 때마다 끈적한 느낌과 닭살이 돋는 기분에 당장이라도 벗어던지고 싶었지만 지금 이런 거 저런 거 가릴 처지가 아니니 정신 차리자는 다짐을 했다.
사장님은 파트타임으로 점심시간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은 4~5시간이라고 했지만 11시에 식당이 문을 여는 것으로 보아 10시 반쯤 출근해 2시 반에 퇴근할 것 같았다. 뉴질랜드에서의 첫 아르바이트의 경험이 좋지는 않았기에 내 권리는 야무지게 챙기자는 다짐을 이번에는 꼭 실천하려 했다. 시간당 일한 만큼의 보수를 받는 최저시급이기에 단 5분도 늦거나 빠름 없이 출근하고, 퇴근해야 한다. 이것은 첫 파트타임에 경험한 것이기에 Trial 기간이라도 어김없이 사장님이 말한 정시에 맞춰 출근을 했다.
일단 식당에서 무엇을 파는지 알아야 하니 워홀러 친구와 나는 메뉴판을 읽어 내려갔다. 한국음식이니 익숙했고 꽤 비싼 가격에 놀라기도 했다. 한 푼이 아쉬운 워홀러 친구도 식당의 음식가격을 보고 흠칫 놀라며 이래서 한식당은 월급날에 향수병 치료를 위해 가끔 올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을 했다. 뉴질랜드 물가가 나날이 올라가니 우리 식구는 집에서 주로 해 먹었고 삼시 세끼를 하다 보니 남편과 나는 장금이가 되어 점점 더 외식물가를 몰라 한식당의 음식이 마냥 비싸게 느껴졌다. 그러나 식재료와 인건비를 따지면 이곳에서의 가격은 터무니없진 않았다. 맛은?? 안 먹어봐서 모르겠다.
오픈시간이 되자마자 손님이 오셨다. 본격적인 응대가 시작됐다. 사장님은 워홀러 친구와 나를 번갈아 내보내며 손님을 응대하는 방법을 살피는 듯했다. 손님의 인원수에 맞춰 앉을자리를 안내하고 물과 차를 가져다 드리고 주문을 받았다. 손님이 주문한 메뉴를 셰프가 있는 곳으로 가 큰 소리로 말하고 주문표를 전달했다. 주문한 음식에 따라 숟가락, 젓가락, 식기 등을 세팅했다. 음식이 나오면 테이블로 갖다 드리고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를 건넸다. 식사 중간에 부족한 반찬은 없는지, 음식 맛은 잘 맞는지 체크해 주방에 피드백을 전달했다.
일이 끝날 때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아 정신은 없었지만 시간이 잘 갔고 사람들과 얼굴을 보며 일을 할 수 있는 것에 즐거움까지 느꼈다. 가족들의 식사를 준비하고 먹고 치우는 것에 능한 아줌마라 잔반처리와 설거지거리를 주방에 전달하는 것에 더러움을 느끼진 않았다. 어차피 설거지는 담당이 따로 있었기에 설거지 그릇은 주방으로 다시 놓아주고 손 씻고 나오면 그만이었다.
일을 마치고 사장님이 워홀러 친구와 나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오늘 우리의 서빙에 관한 피드백이었는데 나에게는 손님에게 추가 밑반찬은 제공하지 않으니 유료인 점을 안내하라했고 워홀러 친구에게는 손님에게 웃으며 안내하기를 원했고, 검은색 바지가 복장규정이니 레깅스보다는 일반 검은색 바지를 입고 출근하라 고 하셨다. 네일아트가 과하다는 점, 행동이 조금 빨랐으면 좋겠다는 점을 당부했다. 더불어 영주권을 지원할 수 있는 큰 규모의 식당이니 워홀러로도 전혀 불리한 점은 없을 거다, 좀 더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다며 내일 보자고 했다.
사장님의 피드백이 끝나자 워홀러 친구는 일이 끝난 뒤 점심식사 제공 약속은 유효한 것인지 물었고 사장님은 우리 둘에게 점심을 먹고 가라고 하셨지만 아이들의 픽업시간이 다가오기에 나는 서둘러 유니폼을 갈아입고 아이들의 학교로 향했다.
Trial에 관한 피드백 시간이 길어지며 아이들을 데리러 가는 시간이 빠듯해 나는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뛰며 머리로는 오늘 일에 관한 일을 생각했다.
홀 서빙이 이리 쉬운 줄 알았다면 그동안 빵집 어두운 구석에서 사장부부의 갑질을 뭐 하러 듣고 있었나 자괴감마저 들 정도였다. 오늘처럼 손님이 많은 식당이라면 워홀러 친구와 내가 모두 파트타임으로 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내가 식당의 사장이 아니니 우리 둘의 미래는 Trial마지막 날에 결정 난다는 점이 묘하게 긴장됐다.
일이 바빠 워홀러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지만 행여 사장님의 여러 지적에 마음이 상해 다음날 안 나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나는 들은 바 없지만, 사장님이 식사 제공을 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게끔 먼저 말을 꺼낸 워홀러 친구는 당찬 성격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러니 사장님이 몇 가지 지적했다 한들 신경 쓰지 말고 내일 웃는 얼굴로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눈앞에 나를 향해 뛰어오는 아이들을 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가 누구를 걱정하나!
나는 한 푼이 아쉬운 애 둘 엄마인데, 아줌마의 마음 속 오지랖은 그만 부리고 내 앞가림이나 잘하자!
우리는 네 식구 숨만 쉬어도 술술 새어나가는 지출에 허덕이는 최저시급의 외국인노동자 아닌가!!
워홀러와 아줌마의 다소 불편한 경쟁이라도 최선은 다해보자는 생각을 하며 내 아이 둘의 손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