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순환, 치유의 힘을 맛보다.

by I rene

시골생활의 가장 큰 기쁨은 생명의 한해살이를 지켜보는 것이다. 아침마다 일어나서 심었던 씨앗의 싹이 얼마나 자랐는지 보는 것은 신기한 경험이다.


도시에선 화분을 죽이는 마이너스 손이었다. 언제 물을 줘야 하는지, 꽃의 상태는 어떤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식물과 대화까지 하던 엄마와는 전혀 다른 유전자를 가진 나 인 것 같다. 그런 내가 이제는 흙을 스스럼없이 만지고, 땅도 갈고, 씨를 심기도 한다. 생명을 키워낸다는 것에 자긍심이 생긴다. 그러는 동안 어딘가 모르게 주눅 들어있던 내 자존감이 조금씩 회복되는 기적을 맛보았다.


시골 와서 갓 생긴 셋째 아이는 얼굴도 못보고 태중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늦은 나이의 임신이었다. 사실 아이 가진지도 모른 채 약도 먹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 열심히 돌아 다녔다. 모두 내 탓이라는 마음에 한동안 두문불출 집에만 있었다.


어느 날 지인이 남편을 통해 봉투 하나를 보내 주었다. 곱게 접은 하얀 종이에 여러 가지 씨앗이 담겨 있었다. 꽃을 좋아하는 내가 생각나서 주었다는 데, 마음이 찡했다. 그분의 따뜻한 위로가 느껴졌다.


갓 아지랑이가 피어나던 봄날, 묵은 자리를 털고 마당으로 나갔다. 꽃밭에 잡초를 걷어내며 내 마음의 슬픔과 뒤섞인 미안함을 치워 버렸다. 곱게 갈아놓은 땅에 씨를 심었다. 그리고 매일 물을 주고 싹이 트길 기다렸다. 매일 아침이 되면 대문을 열고 꽃밭에 쭈그리고 앉아 크는 싹을 구경했다. 그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다.


꽃이 자라기까지 아주 오래 기다려야 하는 것을 알았다. 내 자신의 아픔에만 집중했던 삶에서 눈을 돌리니 더 많은 생명들이 보였다. 나는 상실을 통해 다른 생명을 맞이하는 법을 배웠다. 어떤 생명이든 쉽게 오는 법이 없고 또 자라기까지 무던히 지켜보고 돌봐야 한다는 것도. 인생도 그와 같다. 슬픈 날도 기쁜 날도 있고 지나면 새로운 날이 온다. 이것은 나의 시골살이에 눈을 뜨게 하는 중요한 시작점이 되어 주었다.


자연은 치유하는 힘이 있다.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봄이 녹여주고 싹트게 하고, 다시 여름이 뜨거운 태양으로 키워내고, 가을은 그것들을 품에 품어 열매 맺게 한다.


이런 한해살이를 지켜보며 나 또한 새 힘을 얻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많은 종류의 꽃을 가꾸었다. 모든 것이 서툴고 새롭지만 걸음마 뗀 아기처럼 천천히 더디게 걸어간다. 하나, 둘, 셋, 성공의 경험이 늘어날 때쯤 아마도 난 시골 생활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자연이 주는 위로는 순박하고 꾸밈이 없다. 그래서 시골 사람들은 그 느낌을 닮아 가는지 모르겠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는 한 늘 그만큼의 정직한 보상을 받는다. 땅을 밟으며 사계절을 경험하고 무엇인가를 키워낸다는 것이 신기하고 감사하다.

씨앗 속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다. 그 생명이 자라서 다시 열매를 맺는다. 생명이 생명을 낳으며 순환한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다면 나도 언젠가 다른 이들에게 생명의 한 조각 남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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