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가-

<자연사 박물관>을 읽다 쓰다

by 시린

표지에 눈이 머물렀다. 연극적인 모습과 동작으로 멈춰 있는 사람들. 이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던가? 날개에는 ‘극단 동’이라고만 써 있다. 극중 인물의 극중 한 순간인 모양이다.


한 사람 한 사람 톺아보다가,

이번엔 ‘소설집’에 오래 있었다. 집이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여러 여성이 소설이라는 집에 모여있는 걸로 보인다. 이제 보니 남성도 있네, 다양한 사람들이.


책을 집으로 표현하는 우리말이 나는 너무 좋다. 소설집, 시집, 사진집, 희곡집, 수필집. 이야기와 시와 사진과 인물과 사건과 일상이 모여 살아가는 집. ‘모이다’를 뜻하는 한자와 우리말 ‘집’의 발음이 같다는 우연이 대단한 복인 양 느껴지는 거다.


연작단편 형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 책만 봐도 그렇다. 가방을 메거나 우산을 들고, 표지의 사람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 텐가. 물론 모두 집으로 가고 있다.


하나,

하나같이 가난하고 불행한 이들은 집 없는 사람들이다. 일을 끝내고 돌아가 쉴 곳, 웃으며 맞아줄 가족, 식탁에 모여 먹을 음식, 함께 먹으며 즐거이 나눌 이야기가 없다. 남자들은 공장과 농성현장과 어딘지 모를 곳에서 밤을 보내느라 집에 오지 못하고, 여자는 불안한 마음과 쏟아낼 불평만 쌓여가고, 그러니 오랜만에 보거나 통화를 할 때도 그런 말밖에 못하고, 자식은 선물로 가져온 참외나 식당의 냉면만 탐하고, 그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고, 가족이라 하기엔 너무 먼 친척과는 음식(굴전)을 만들 수는 있어도 함께 먹을 수는 없고, 그들은(왕고모부 부부) 보지 못하거나 듣지 못해 대화도 할 수 없다.


그녀의 소설은 인간이 ‘시간이라는 성분’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줄곧 확인한다, 고 김남일 소설가는 말하고 있다. 시간도 몸을 부릴 공간이 필요하기에, 시간으로 만들어진 인간에게는 집이 필요하다. 가족에게는 집이 필요하다. 가족이란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여,

소설집의 사람들은 집으로 가고 있다. ‘자연사 박물관’과 ‘크라운 공장’과 무덤과 ‘노블 카운티’와 베란다가 있는 집과 엘리베이터와 ‘카티클란’에 있는 그들은, 아직 집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빛을 향해 걷는다. 집으로 돌아가 불을 켜기 위해.


“오래된 집은 사람 안에 살기도 하나 봐요.(76p)” “그것은 고요한 대낮, 지나가는 바람결에 어느 빈집의 대문이 열리는 소리 같았다.(85p)” 생각에 화답해 주는 듯한, 이런 문장들을 발견할 때마다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