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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Sep 18. 2022

작고 약한 존재들이 살아가는 법

집으로 돌아오다 쓰다

추석 연휴를 앞둔 날이라 동네 골목 전체가 주차장이었다. 집벽에 아슬아슬하게 붙여 댄 차들에서 최대한 먼 쪽으로 차를 몰았지만, 반대편 담과의 사이도 딱 그만큼의 폭밖에 되지 않았다. 큰 차나 벽에 찰싹 붙이지 못한 차를 지날 때는 귀(사이드 미러)를 접어야 했다. 길을 잃고 흘러들어온 허씨 일가(렌터카)나 초보 운전자와 마주쳐 몇 번이나 곡예 같은 후진을 하기도 했다.


운전할 때도 욕은 안 하는 느긋한 성격이지만 집을 일 킬로미터 앞에 두고 후진을 반복하려니 붕당붕당(궁시렁궁시렁)하게는 되었다. 이 시골에 웬 차가 이리 많나. 기름값은 미쳐 날뛰는데 다들 걱정도 안 되나. 새 차에 외제차는 또 뭐 이리 많나. 먹고 사는 걱정은 나만 하는 건가. 아이오닉 루비콘 포드를 흘기면서도 담벼락을 비비며 지나갈지언정 저 차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며, 멀리 최대한 멀리 지나가는 중이었다.


포드 앞으로 차 하나 세울 정도의 공간을 두고 까만 아반떼가 서 있었다. 저기만 지나가면 길이 좀 넓어진다, 엑셀에 얹힌 발가락에 힘을 실으려는데, 아반떼 오른쪽 뒷문이 홱 열렸다. 뭔가 튀어나온다.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그러고 보니 어린이집 앞이다. 아반떼는 아이를 데리러 온 참인가 보았다. 노란 가방을 멘 아이가 내 코끝을 종종 지나 운전석 문에 달라붙었고 창문이 내려갔다. 웨이브 머리가 튀어나와 뒤를 흘끔 보더니 다급한 손짓을 섞어 무어라 말했지만 아이는 발만 동동거렸다. 한 마디 안 들려도 알 만했다. 아이는 뭔가 투정을 부리고, 웨이브는  일단 타라, 싫어 당장 해 줘, 위험해 얼른 타지 못해?


엄마인지 이모인지 웨이브 여인은 기다리고 있는 내 차와 언제 다른 차가 나타날지 모를 길모퉁이를 초조하게 두리번댔고, 나 역시 다른 데로 또 뛰어갈까 싶어 조마조마하게 아이를 지켜봤다. 노란 가방이 간신히 매달려 있는 몸이 너무 작아 큰 차에서는 미처 못 볼 수도 있다. 나도, 아이가 튀어나오던 순간 전화벨이 울려 주의를 뺏기기라도 했다면… 뒤늦게 오싹했다.


그 때. 아반떼의 오른쪽 뒷문이 다시 열렸다. 작은 머리 하나가 쏙 나온다. 아이보다 한 살이나 많을까 싶은 다른 아이. 머리 한쪽을 묶었다. 여자아이 혹은 머리 묶은 남자아이의 얼굴이 나를 한 번 보더니 몸의 절반이 따라 올라왔다. 차문에 매달린 모양새로 나를 향한 아이가 왼손을 올렸다. 건널목을 건널 때처럼.


눈이 마주쳤지만 아이는 선글라스 속의 내 눈이 안 보였던 모양이다. 뭔가 말하려는 듯 벌어졌던 입을 그냥 다물었다. 대신, 올린 왼손을 내 쪽으로 뻗어 손바닥이 보이도록 다섯 손가락을 쫙 폈다가 주먹을 꼭 쥐었다. 멈춰 주세요. 기다려 주세요.


여기 있어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손도 흔들어 보였다. 보여. 기다릴게. 진지한 눈, 앙다문 입. 아이가 작은 주먹을 풀지 않아서 나도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길어봐야 일 분 정도였을 테다. 그래도 아이의 팔이 아플 정도는 된 거 아닌가 걱정이 됐다. 다행히 웨이브 여인이 문을 열고 노란 가방 아이를 안아 넣었다. 자리에 제대로 앉히는 동안 먼저 갈 수도 있었지만 아반떼가 골목에서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늘 마실하는 길에 귤상자를 쌓아둔 빈터가 있다. 철이 되어 쓰이기를 기다리는 상자더미에 풀과 넝쿨이 엉겨 담이 되었다. 그 담 앞에서 걸음을 멈추곤 한다. 밭일하고 정원 가꾸는 사람들의 적, 지긋지긋하고 징글징글하고 무서운 검질, 잡초는 무섭다. 갓 났을 땐 약한데 금세 세진다. 하나하나는 작은데 순식간에 커다란 한 덩어리가 된다. 며칠 전 태풍에 몇 그루인가 나무가 꺾이고 간판이며 평상이 날아가기도 했는데 풀과 한몸이 된 덕에 상자들은 무사했다. 상자들 덕에 풀들도 괜찮았다.


작고 약한 존재들은 작고 약해서 살아가기 힘들다. 그래도 살아야지. 살아가기 힘든 세상을 살아내는 법이 뭐지? 그런 게 있나? 모를 수도 있고, 안대도 힘들 테다. 그래도 찾아는 봐야지. 작은 몸을 모아도 보고 한데 뭉쳐도 봐야지. 기대고 비비고, 서로의 몸을 덮어라도 봐야지. 손을 들어. 흔들어 보고 주먹도 쥐어 봐. 저 여기 있어요.


나도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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