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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Oct 01. 2022

속도들

붕붕이를 보내고 쓰다

2만원치 충전했다. 리터당 1091원이니 남아있던 거랑 합쳐져 20리터쯤 채워졌겠다. 연비가 10킬로미터만 나와준다면 200킬로미터쯤 달릴 수 있겠다. 그게 갈 수 있는 마지막 거리겠다. 내가, 아니 네가.


어디를 갈까. 해안도로가 200킬로미터를 조금 넘으니 섬을 한 바퀴 돌 수도 있다. 바다를 끼고 달릴까 하다 산길로 올라간다. 생각없이 몸을 맡기면 익숙한 곳으로 가게 될 거란 걸 알았다. 목적없이 달리면 어느새 좋아하는 길에 서 있을 거였다.


서성로를 달려 수망리를 지나 가시리로. 녹산로에서 비자림로를 거쳐 금백조로로. 지금 좋아하는 길이 예전 좋아했던 모습은 아니지만 기억이 있으니 괜찮다. ㅍ를 만났던 곳, ㅎ과 맨발로 걸었던 곳, ㅅ와 사진을 찍고 ㄱ과 어둡도록 이야기하던 곳의 기억들이 열어둔 창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기억이 기억을 밀어내며 파도를 쳤다.


번영로에서 듣던 노래들, 애조로에서 지어본 노래들, 잡히지 않는 단어를 붙들어보겠다고 서야 할 곳을 지나친 날 얼마큼일까. 가사도 모르는 노래를 소리소리 질러 부르다 울음이 터졌던 적은. 평화로로 가야 해. 몇 계절 붙들고 있다 결국 완성 못한 문장들은 어디 있을까. 다시 흙먼지로 흩어졌을까. 밟으면 피어올랐다 이내 가라앉는 상념은 뒷거울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상보다 시속이 빠른 듯했다.


평화로, 산록도로, 해안도로,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쓰는 길과 아무도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 길들. 목적지가 있을 땐 점과 점을 잇는 선이지만, 멈춰있고 머무를 땐 바닥을 펼쳐 공간이 되어주는 곳.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낮꿈을 꾸기도 했던, 그 길바닥을 모두 모아 이어 펼치면 얼마큼의 넓이가 될까. 그 중 한 뼘도 내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빌려쓸 수는 있으니까. 누구 건지 신경쓰지 않고 눈치보지 않는다. 삼춘도 그랬거든. 질이 나꺼 너꺼 이시냐(길에 내 거 너 거 있냐)? 아무데나 서고 아무데나 앉는다. 오름 아래서 잠시 멈췄다. 김밥 한 줄과 커피. 달리면서 많이도 마셨고 흘리기도 많이 했지. 차에서도 커피 냄새가 난다고 ㅁ이 말했었지.


평화로에서 차를 세운 미친년이었을 때. 세운 걸로도 모자라 눈보라 속에서 차 위에 올라섰을 때. 몸 속에서 딸깍 하고 스위치가 바뀌는 소리가 났었다. 튼튼하게 나를 받쳐주었던 차도, 씩씩한 척하던 나도 많이 낡았지만 아직 괜찮다. 스위치는 내려가지 않았다.


달린다. 충전램프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남은 거리를 가늠해 보았다. 아직 괜찮아.

 


폐차신청을 하니 금방 와서 데려갔다. 삼십 분쯤 후에 말소등록을 끝냈다며 서류와 함께 몇 만원의 인수금을 보내주었다. 사물이 사라지는 건 순식간이다. 사람의 마음만 오래 구질구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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