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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Oct 06. 2022

어떤 커피를 원하냐고 물으신다면

편의점에서 커피를 사다 쓰다

제주 삼춘들은 목소리가 크다. 말투는 퉁명스럽다. 무가 뚝뚝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단칼에 베어 날린다. 대부분 반말이다. 싹싹함이 없다느니 친절하지 않다느니는 몹시 순화한 표현이다. 그러잖아도 남의 지역 말은 다 싸우는 것 같은데 제주에선 금방 칼부림이라도 나는 거 아닌가 싶다.


가게 들어갔는데 어서 오세요는커녕 아는 척도 안 한다고 섭섭해 마시라. 뭐 있냐고 물었다가 그게 뭐냐고 화를 내도 그러려니 하시라. 일일이 마음 상하면 아무데도 못 간다. 게다가 그분들이 무슨 감정이 있어 그러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렇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일하는 식당 카페 등등에 삼춘들이 왔을 때. 다짜고짜 문 열고 “뭐 없냐”고 소리를 쳐도, 다른 손님을 상대하는 중에 왈칵발칵 끼어들어도 그냥 “예” “감수다(지들립서)” 하시라. 큰 소리로 두 번 세 번 하시라. 듣고도 못 듣는 경우가 많다. 목소리 크고 급한 사람일수록 그렇다.


어제 오후 모처의 편의점. 남자삼춘 한 분이 들어왔다. 오른쪽으로 두 걸음 걸어 막다른 냉장고 안을 들여다보더니 소리쳤다.


”야, 이딘 점빵이 커피도 어시냐(얘, 여긴 점방에 커피도 없니? = 커피 있니?)”


카운터에서 유튜브로 뮤비를 보고 있던 앳된 핑크머리가 폰을 막 내려놓으려던 동작 그대로 굳었다. 어어어어어어얼으으ㅁ이 되는 소리가 들렸다. 물론, 비록 얼음이라도 최강알바는 해야 할 일을 해내지. 어떤 순간에도 친절한 미소를 잃지 않고 겁먹은 티도 내지 않고. 하나, 서비스맨에게 권장하는 ‘솔‘을 넘어 ’시샾’으로 나와버린 목소리는 사정없는 비브라토 때문에 더 애처로웠다.


”어어어떤 커피 찾으시는데효오오옷?“


이런, 답이 틀렸다. ”이수다(있어요)“하고 튀어나와서 직접 안내했어야지. 맥심 맥스웰커피 꺼내오던지 냉장고 앞에 모셔 갔어야지. 삼춘이 초사이어인으로 변신하는 소리가 고오오오오오오오 울렸다.


그러나 또 한 번의 그러나. 삼춘은 대화할 줄 아는 분이었다. 초사이어인의 포르티시모 음성으로 질문의 답을 외쳤다.


”영(이렇게) 동그랗고, 영 마시는 거!“


우와. 하마터면 사랑에 빠질 뻔했다.


입까지 얼어버린 핑크얼음은 가망이 없어 보여 웬만하면 감춰놓는 오지랖을 꺼냈다. 거울에 비치는 일모자(햇빛 가림용 망사가 넓게 달린 모자) 아래 얼굴을 한번 보고 싶기도 해서, 비죽비죽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누르고 말했다.


“삼춘! 이착트레 오십서. 이디 몬 동그랗고 마시는 커피우다. 왕 봥 고릅서양.(이쪽으로 오세요. 여기 다 동그랗고 마시는 커피에요. 와서 보고 고르세요.)“


“무시거 이추룩 하.(뭐 이리 많아)” 삼춘이 붕당붕당하며 고른 커피를 사서 나간 후에 나도 들고 있던 걸 계산했다. 핑크가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무서웠다고 혀를 쏙 내미는데 끝에 구슬이 박혀 있다. 혀 뚫는 건 안 무서웠나 보다. 뭘요, 말투만 좀 그렇지 좋은 분 같은데요? 동네분 같으니까 또 오시면 커피 얼른 찾아 드리세요. 계속 비어지는 웃음을 입끝에 물고 나왔다.


차를 출발시키고서야 입을 풀고 웃었다. 마음은 급하고 말은 생각 안 나고, 본인은 오죽 답답했을까. 화 나는데 내지도 못해서 얼마나 더 화가 났을까. 웃긴데 짠했던 삼춘의 붉은 얼굴이 쉬 떨어지지 않았다. 한참 실실거리다 신호 대기에 걸려 손에 든 걸 마시려는데-


뭐냐 이게. 분명 물 사러 들어갔었는데 왜 이런 걸 들고 있는 거냐. 아고게(아이고), 동그랗고 마시는 커피에 단단히 홀렸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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