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삐딱하게 보기>를 읽다 쓰다
책만 보면 머리가 아프다는 사람이 있는데 읽을 때 머리를 많이 써서 오는 증상인 듯싶다. 읽기를 곧 배움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주로 나타나는 현상이겠다.
지식, 지혜, 인생의 길, 그런 걸 찾겠다는 학습목표 같은 거, 나한텐 없다. 재밌어서 읽거나 재미없어서 읽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대체로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문장을 따라갈 뿐이다. 작가마다 호흡이 다르고, 거기에 맞춰 텍스트와 은유와 서사를 따라가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생각 같은 걸 하다보면 놓쳐버린다. 지면의 몇 센티미터 위에서 헤매던 자신의 눈길과 마주칠 때의 어이없음이란. 갈수록 읽는 속도가 느려지는 이유가 이거다. 생각하지 않음의 실패. 지면과 눈 사이에 자꾸 생각이 끼어드는 거다.
읽을 땐 음악도 잘 듣지 않는다. 일부러 카페에 갈 일도 없다. 이불 속이 최고다. 겨울이 여름보다 읽기에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불 속에만 있고 싶을 때,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아무 생각 하기 싫을 때 읽는다. 텍스트와 은유와 서사를 부지런히 따라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독할 수 없는 문장과 독해되지 않는 책도 있다. 열심히 읽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고 당연히 기억도 할 수도 없다.
그래도 끝까지 읽는다. 이런 경우라도 재미는 있다. 다만 나중에 온다. 시간이 좀 지난 어느 때, 늦은 이해가 재미를 데리고 도착하는 거다. ”그 말이 이거였구나!“ 문해력보다 인내심이 읽기에 유용할 때도 있다.
물론 아무리 멋진 이유래도 읽는 내내 인내심을 충전하게 하는 책이 있다. 수시로 던져버리고픈 충동을 누르는 힘은 인내가 아니라 강박이다. 좋게 말해도 고집이다. 일단 시작한 책은 끝까지 읽어야 후련한 고약한 성미인 거다.
슬라보예 지젝이 대중문화에 대어 라깡을 쉽게(!) 풀어내는 책 <삐딱하게 보기>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그에 의하면 코난 도일, 레이먼드 챈들러, 프루스트, 카프카, 히치코크, 스필버그 ..결국 모든 문화의 기호는 라깡이 제시한 공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명쾌하게’. (아래 왼쪽 사진이 공식, 오른쪽 사진은 패트리시아 하이스미스의 소설을 대입한 것.)
읽는 내내 이 공식을 들여다봤다.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수학적으로, 미학적으로, 그외 알고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보았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길도, 공식에 기호를 대입하는 해법도 찾지 못했다. ‘명쾌하게’ 알아낸 건 하나뿐이다. 나는 문학적으로도, 철학적으로도, 수학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결국 모든 면에서 덜 떨어지고 생각이란 게 없다. 적당한 데서 포기할 줄 모르는 고약한 성미만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