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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Nov 08. 2022

끝나지 않는 문장

조한욱 <내 곁의 세계사>를 읽다 쓰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자기는 죄가 없다고 했다. 자기는 빌라도와 같았다고 했다. 그는 예수를 살리고자 했으나 유대인들 스스로 왕을 죽였다고 했다.


그는 은유 즉 예술을 시도했다. 농담을 던졌다. 이 지독한 클리셰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끄집어냈다. 악은 평범한 모습과 상투적인 표현 속에 있다. 모두 속았고, 속고 있다.


아렌트는 죄와 책임을 구분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했다. 이도 사람들은 오독했다. 죄를 뒤지고 책임을 물었다. 독일인들은 유대인 학살을 몰랐다고 했다. 자기 일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죄도 책임도 없다고 했다. 모두 히틀러라는 악이 저질렀다고 했다.


아이히만의 농담은 죄의 부인을 넘어 책임전가였기에 더욱 질이 나쁘다. ‘왕을 죽인 민족‘의 ’신을 죽인 죄’를 들먹였다. 폭탄 돌리기가 시작됐다. 다들 언제 올지 모를 폭탄을 어떻게든 피해야 했다. 원인과 결과가 혼동되고, 급기야 피해자에게 폭탄이 갔다.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왜 당신들이었나?(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그러니까 당신들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나? 왜 사전에 피하지 않았나?


<내 곁의 세계사>를 읽은 지 오래 되었는데 꽂지 못하고 자꾸 들었다 놨다 하고 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


저자는 타이타닉 이야기로 책을 시작한다. “타이타닉 호의 침몰은 영화 <타이타닉>을 통해 새롭게 해석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사실이 왜곡되었다. 세월호 침몰 사건은 타이타닉 침몰 사건과 그 원인이 유사할 뿐 아니라 이후 대처 과정에서 보이는 왜곡마저도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러한 유사성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계의 다른 곳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사회적 문제와 트라우마를 극복하려 했는지 배움으로써 우리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최소한의 교훈이라도 되새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고 이야기하는 의의라는 거다. ‘역사는 반복이다’라는 상투적 표현이 면죄부라도 되는 양 내밀며 숨지 말라는 거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면 대체 공부는 왜 하는 것이며 살아가는 의미는 뭐냐 말이다.


”사건의 진상 규명은 하지 않은 채 오히려 피해자들을 범죄자인 것처럼 백안시하는 이 사회의 잔인함이 그 뒤바뀐 운명에 겹쳐진다.“


이 문장에 계속 붙들려 있다. 416 참사 이후로 8년, 이 책이 나온 지 7년 되었다. 1029는 이제 열흘 지났을 뿐이다. 이 상투적인 악이 언제 끝날까. 아니 이를 지켜봐야 하는 고통스런 반복이. 눈을 떼지 않기 위해 매일 하루치의 용기를 쥐어짜내는 날들이.


*아래는 이 문장이 쓰인 [브루스 이스메이]편 전문

-타이타닉의 침몰과 뒤바뀐 운명-

제임스 캐머런은 영화 <타이타닉>에서 충직한 선장과 악덕한 선주를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그러나 그 근거는 올바른 사실이 아니었다.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는 화이트스타 선박회사를 건실하게 경영했다. 경쟁을 벌이던 큐나드 선박회사에서 루시타니아와 모레타니아라는 두 척의 대형 호화 유람선을 출범시키자 이스메이는 그에 대응하여 5년에 걸쳐 최고의 기술을 동원해 세계 최대의 선박 타이타닉을 만들었다.

이스메이는 타이타닉의 첫 출항에 동승했다. 그 운명의 침몰 이후 그의 사회적 지위도 함께 가라앉았다. ‘여성과 어린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도외시하고 살아 돌아온 부도덕한 선주라는 오명에다가 부족한 구명정에 대한 책임론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메이는 끝까지 승객들을 구명정에 태우고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마지막 구명정의 마지막 자리에 탔음이 재판에서 밝혀졌다. 구명정의 숫자 역시 당시의 기준에 부합했다. 그가 받은 손가락질의 가장 큰 원인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이끄는 언론 족벌의 보도였다. 이스메이와 사이가 좋지 않던 허스트는 자신의 신문에 희생자 명단을 실으며, 생존자 명단에는 이스메이만을 기재하는 식의 악의적 보도를 반복했다. 사실 이스메이는 선원들의 부인을 위해 막대한 돈을 기부했고, 오명 속에서도 타이타닉에 관해 어떤 한마디도 입에 담지 않은 채 여생을 보냈다.

실상 타이타닉의 침몰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존 스미스 선장이었다. 빙산이 떠돌아다닌다는 무전을 수없이 받고도 별 조치 없이 잠에 들었던 그는 충돌 이후에도 초동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배와 운명을 함께했다는 이유로 그는 영웅으로 기억된다. 사악한 선주에 비교되는 충직한 선장이라는 주제는 캐머런이든 누구든 영화감독으로서 놓칠 수 없었을 것이다.

원인 규명은 도외시하며 피해자들을 범죄자인 것처럼 백안시하는 이 정권의 잔인함이 그 뒤바뀐 운명에 겹쳐진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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