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봉한 <타이타닉>을 보다 쓰다
25년만에 본 타이타닉은 재난영화나 사랑영화라기보다는, 아니 그게 뼈대긴 하지만 다른 것들이 많이 보이는 서사를 갖고 있었다. 계급, 배금주의, 불평등, 심리분석, 속물근성, 부유층에서 주로 보이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은근한 무시 뭐 그런 것들.
케이트 윈슬렛은 당시 디카프리오의 꽃미모와 팬덤 탓에 꽤나 고생을 했다. 그녀의 역할이나 연기에 대한 좋은 평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아니 언급조차 안 하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탓에 빤히 드러나 있는 장치들을 잔뜩 놓쳤다. 25년의 시간이 거품을 가라앉히고 나니 매직아이 뒤의 그림들이 떠올랐다. 3D안경도 조금은 도움이 됐을까.
스펙터클을 걷어내고 서사와 대사에 집중해 보니,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만 갖은 제약에 갇혀 사는 여인이 자기의 이름을 찾는 성장기더라. 결말부에서 로즈는 ’우리가 왕족‘이라 했던 약혼자와 왕족의 이름을 버리고 스스로 붙인 새 이름을 말한다. 그리고 사랑하면서도 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예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로즈와 약혼자 칼은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들을 가지고 배에 타는데 칼은 금고, 로즈는 그림들이다. 이들은 모두 배와 함께 가라앉지만 로즈가 금고에 넣은 그림만은 수십 년 후 발굴되어 돌아온다. 그녀가 모델을 자처해 그려 달라 했던 그림이다. 스스로 날기를 원했던 그녀는 이렇게 예술 속에 남는다.
보석과 돈은 사라지고 예술은 남는다는 설정은 진부하지만 다른 의미도 있다. ’예술에 대한 관점‘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 칼의 관점이란 즉 값이다. 그는 ’싸다‘, ’돈이 안 된다‘ 는 식의 표현을 서슴지 않고, 화가의 유명세를 먼저 따진다. 예술을 자본의 하위로 취급하는 권력층의 모습인 건데, 지금이라고 다르지 않으므로 설정은 진부함을 넘어 풍자가 된다.
로즈의 방에 있던 건 모네와 ‘값싼’ 드가, ‘무슨’ 피카소와 세잔의 그림, 정확하게는 습작들이다. 이들의 그림을 찾아보는 것도 영화의 또다른 재미와 기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