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와의 대화>를 읽다 쓰다
“사람들은 언제나 아이 이전에 듣고 보았던 것을 다시 듣고 보려는 경향이 있는 법이다. 그리고 문학이라는 꽃을 순수하게 시적인 영토에서 만나는 데 익숙해 있다. 그러므로 이번 경우에 문학이 철저하게 현실적인 토양에서 자라나 있는 걸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시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며 어떠한 기적도 믿기지 않을 만큼 전대미문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실제적인 대낮의 환한 빛 가운데서 가장 사소한 것조차도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한다. 그 가장 사소한 것은 사물들의 일상적인 진행으로부터 조금 벗어나 있을 뿐이지만, 우리가 익숙해 있는 수천의 기적들로 둘러싸여 있는 가운데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일하게 낯선 것이다. 사람들은 또한 이전 시대의 기적을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이며 믿는다. 그러나 오늘 일어나고 있는 기적에다가 일종의 현실성을 부여하고, 그 기적을 가시적인 현실에 못지않은 보다 높은 현실로 소중하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요즘 사람들로서는 더 이상 생각지 못할 일인 것처럼 보인다. 설혹 사람들에게 그런 경향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교육에 의해 그러한 감수성이 쇠퇴해 버린 지 오래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기는 점점 더 산문적이 되어가고 있으며,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소통이 미약해짐에 따라 모든 문학들도 점점 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요한 페터 에커만. <괴테와의 대화>중.-
두꺼운 책 두 권은 제목대로 괴테의 말을 옮기는 데 거의 모든 지면을 쓰고 있다. 괴테에 대한 저자의 존경은 숭배에 가까워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놓치지 않고 온전히 담으려 애썼다. 몹시 드문 일이긴 했지만 스승의 말에 동의하지 않을 때조차도. 대부분의 동의와 감탄, 질문들을 빼면 본인의 말은 매우 아꼈는데, 괴테보다는 저자에게 이입했던 나는 책의 문장을 딱 하나 꼽으라면 이걸로 하기로 했다. ’우리의 세기는 점점 더 산문적이 되어가고 있다.’
왕의 이야기는 그닥 내 취향이 아니다. 바이마르의 왕으로 곧잘 표현되는 괴테도 좋지는 않다.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타이틀은 평범한 한국 독자에겐 ‘알 바 모를 바’고, 대체 의기소침한 젊은 베르테르의 어디가 그리 대단한지가 청소년 때부터의 의문이었다. <파우스트>를 어거지로 읽으며 그 위대성이란 것을 짐작할 수 있긴 했는데 어찌나 힘들었던지 이후론 테자 돌림 대작가(괴테, 단테) 책은 그만 읽자고 다짐해 버렸다. 그 시간과 품으로 다른 걸 읽자고.
삼십 년쯤 지나니 다짐은 물욕에 졌고, 재작년에 <파우스트> 새 번역본을 사고야 말았고, 작년에 <괴테와의 대화>를 선물 받았다. 더 도망칠 데가 없었다.
탈출구는 다른 데 있었다. 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작가의 얼굴>에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다. 국제 문학행사에서 동료 작가가 “갑자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조용한 구석 자리로 끌고 갔다. 그는 혹시 누가 엿들을세라, 주변에 스파이라도 있는 양 경계하듯 주위를 살폈다. 그러더니 무슨 음모라도 꾸미듯 소곤소곤 내게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요, 있는 그대로, 그냥 딱 우리끼리니까 말이죠. 내 아무한테도 소문내지 않을 테니, 진짜 절대 불지 않을 테니, 말 좀 해봐요. 괴테 이 양반이 정말로 위대한 작가요?“ ”
한바탕 통쾌히 웃고 나니 드디어 편견 없이 괴테를 읽을 마음이 생겼다. <괴테와의 대화>도 의외로 재미있었다. 서사가 아니라 ‘말’로 이어가는 책은 뚝뚝 끊어지는 게 단점인데 술술 잘 넘어갔다. 저자와 번역가의 필력 덕이다. 괴테가 한창 파우스트를 쓸 때라 그 이야기가 간간이 나오는 것도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다. 파우스트와 작중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 읽기 전 웜업이었달까.
”대부분의 위대한 작가들이 쓴 거의 모든 것들이 결국 자기묘사로 귀착된다는 사실을 나는 괴테에게서 배웠다. 그는 참으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고, 동시에 우리 모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것이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른다.“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작가의 얼굴> 중.-
의미를 따지자면 한없이 어려운 책이지만 중요인물 모두가 괴테의 초상임을 알고, 문학의 ‘기적’을 받아들일 마음이 되었으니 준비는 끝났다. 파우스트를 읽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