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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Mar 01. 2023

글맛을 잃었을 때

듀나를 읽다 쓰다

뭘 먹어도 맛이 없고 평소 좋아하던 음식도 그저그렇고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고 급기야 먹는 것 자체가 귀찮을 때 입맛이 없다고 한다. 독서에도 입맛은 있는지 이럴 때가 있다. 뭘 읽어도 재미가 없고 잘만 읽고 있던 책도 시큰둥하고 딱히 읽고 싶은 글도 없고 급기야 읽는 것 자체가 피곤할 때. 글맛을 잃었다고나 할까.


하루라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는 안 돋히지만 가슴에 신경질이 맺힌다. 구석에서 읽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인지라 유일한 일거리를 뺏긴 기분이다. 아무 짝에도 도움 안 되는 밥버러지가 된 것 같고 그렇다. 책을 읽으나 안 읽으나 다른 돈벌이를 안 하고 있으니 이러나저러나 밥버러지인 주제에 이만저만 어불성설이 아니다.

 

조목조목 따진다고 신경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화를 다스려야, 사라진 글맛을 살려야 한다. 어떻게? 읽어서. 입맛은 먹어서 살리는 법. 읽는맛을 돋우어 줄 글을 골라 읽는다. 신침을 돌게 하는 애피타이저, 위장을 데워 주는 아페리티프 같은 글을.


어릴 땐 주로 만화였고, SF, 판타지를 즐겨찾고, 실패 없는 작가들의 목록도 있다. 그중에서 안 읽은 책이 있나 제일 먼저 찾아보는 이름이 듀나다. 내겐 듀나의 글이 봄 냉이국, 도다리쑥국이고 집나갔다가도 돌아오게 하는 가을전어다.


대학교 다닐 때 사당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탔다. 당시 2500원인가 하던 <페이퍼>를 가판대에서 사 읽곤 했는데 듀나의 글이 실린 페이지를 제일 먼저 펼쳤고, 글이 길 땐 읽다 역을 지나치기도 했었다. 단행본을 발견하면 기꺼이 샀지만 많지 않았고 천대받는 장르인 SF소설은 구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땐 인터넷 서점도 없었으니까.


그와중에 이 책을 어떻게 구했더라..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샀지 싶은데 아무튼 <스크린 앞에서 투덜대기>를 발견하고 어찌나 기뻤던지. 얼마나 신나게 읽었던지. 한 장 한 장 뜯어서 씹어먹고 싶었다. 조금만 덜 제정신이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런 글이 좋다고, 이렇게 쓰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쉬운 말을 쉽게 하고 젠 체하지 않는 글. 남들이 다 좋다 해도 내가 싫으면 어째서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글. 쓰지는 않고 자꾸 손에 힘만 들어가고 급기야 읽는 것조차 귀찮아서 유튜브만 들여다보며 밥버러지가 되어갈 때, 듀나의 글로 환기를 한다. 아니, 그걸 핑계로 또 읽고만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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