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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Mar 17. 2023

막은창이우다

옆동네 마실하다 쓰다

촬영이라 하면 말은 그럴싸하다.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거다. 뭘 하고 있느냐는 물음에 ’촬영중입니다.‘라고 답하면 나는 촬영이라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된다.


말하자면, 말한다면 그렇다는 거다.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고, 누가 물어보지 않으면 말할 수 없다. 누군가와 마주칠 때마다 촬영하고 있다, 며 묻지도 않은 말을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러니 남의 동네에서 카메라를 들고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는 나는 하릴없이 수상한 사람일 뿐이다.


“어(디)서 와수꽈?”

온당한 질문이며 고맙기까지 하다. 오해와 의심을 씻을 기회를 주고 있지 않나. “공천포마씸.” “마실헴수다.” 얼른 대답하면 대개 끄덕끄덕한다. 그거 찍엉 뭐 하젠(뭐 하려고?), 묻기도 하고 무시거무시거(뭐라뭐라), 마을사름만 아는 정보를 알려주기도 한다.


지금이야 넉살이 호끌락허게라도(조금이나마) 늘었으니 이만큼의 대화나마 가능해진 거다. 전엔 어림없었다. “무시거 찍으멘?” 뒷통수에 끼얹어진 말에 추물락해(깜짝 놀라) 굳어버렸다. 그냥 묻는 거지만 삼춘들은 목소리도 큰데다 갑자기 나타나 인사도 없이 대뜸 말을 거니 혼내는 말로만 들리는 거다. 게다가 다 반말이다. “어(디)서 완?” 우물우물 대답도 제대로 못 하고 도망가기 일쑤였다.


이제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진 않고. 여전히 가끔씩 도망도 치고 맘도 상한다. 목소리만 큰 게 아니라 진짜 화를 내는 삼춘들도 있으니 어쩔 수 없다.


“어떻게 오셨어요?”

속앓이를 빈번히 한 대신 요령이라는 게 생겼다. 이렇게 물을 땐 악의보다는 호의다. 제줏말을 쓰지 않고 낮게 말했고 심지어 존댓말이다. ’어디서‘ 왔느냐보다 ’어떻게‘ 왔느냐가 좀 더 호의적인 물음임도 경험에서 도출해낸 터다. 덕분에 쫄지 않고 대답했다. “마을 산책하고 있습니다.“


”…옆 마을 사는데 걸어왔고요..“

대답을 듣고도 트럭 아저씨가  가지 않길래 고새 또 쫄아서 얼른 한 마디 더 붙였다. 그래도 안 가네? 안 믿어지나? 아 씨.. 마실헴수다, 할 걸 그랬나? 아니 그냥 여행객인 척할 걸 그랬나? 아니 아니 그냥 못 들은 척 할 걸 그랬나? 아아 씨이.. 이제라도 그냥 가버릴까?… 끽해야 일이 초였을 테지만 일이 분은 족히 넘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렀고, 심장이 입으로 나오려는 찰나에 삼춘이 툭, 던졌다. “막은창인데.“


아 참, 그렇지. 이 길 끝은 막다른 곳이다. 나는 하우스와 과수원을 구불구불 끼고 돌며 걷고 있었는데 서너 번만 더 꺾으면 마지막 귤밭 앞에서 길이 끝날 터였다. 돌아나와야 하지만 어디를 가자는 게 아니라 어슬렁거리는 게 목적인 마실이므로 밭길 흙길 따라 걷고 있던 거였다.


내 의중 따위 알 턱이 없는 삼춘은 자기 집앞 골목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낯선 여자가 길을 잘못 들었나 싶었을 테다. 나잇살이나 먹은 것 같은데 할 일 없이 뭐하는 건가 싶었을 수도 있고. 이렇든 저렇든, 제주 삼춘들은 누가 막다른 길에 접어드는 걸 절대 가만 보고 있지 않는다. 초행길에 이 길이 맞나, 어귀에서 망설이고 있으면 묻지 않아도 알려준다. “막은창이우다!”


그거였구나. 금세 또 마음이 놓인 나는 언제 쫄았냐는 듯 씩씩하게 대꾸했다. “예게, 알아마씸. 저디까지만 가켄 헴수다.”


삼춘은 예ㄱ, 까지만 듣고 트럭을 출발시켰지만, 괜찮았다. 시크하시네, 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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