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희 <목요일의 작가들>을 읽다 쓰다
답장이 늦었습니다. 바빴던 건 아니고요. 옛날 생각을 좀 했어요. 내가 아직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때 말이죠.
그러니까 당신 탓도 있어요. 이제야 편지를 보냈으니 말이에요. 그때 받았다면 어땠을까, 너무 늦게 도착한 글이 읽는 내내 안타까웠습니다.
나는 선생님이 없었거든요. 쓰기를 배워 본 적이 없어요. 물론 작문 수업도 있었고 문예부에 들어가 보기도 했어요. 하지만 어떻게 쓰라고 가르쳐준 사람은 없었어요. 지도교사와 선배들은 이런 글은 쓰지 마라, 저런 표현도 쓰지 마라, 잘못되고 틀린 부분을 지적할 뿐이었습니다. 주제에 벗어나는 얘기를 쓰는 건 잘못이고, 상상을 써서도 안 되었어요. 맞춤법은... 말해 뭐 하나요.
이걸 읽고 저렇게 써 보자, 이번에는 이렇게 써 보면 어떨까, 그런 제안을 하며 함께 글을 써 주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읽고 쓰는 걸 좋아했지만, 점점 재미가 없어졌어요. 당신처럼 길잡이이자 동료가 되어주는 사람을 그때 만났더라면 어땠을까요. 조금 더 좋은 글을 조금 더 많이 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쓰는 게 무서웠던 날들, 쓰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들이 아쉽고 또 아쉽습니다.
쓰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고, 그럼에도 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도 많지요.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모든 공부와 일을 과제와 시험으로 배우고 접한 건 우리나 아이들이나 같은 걸요. ‘못’ 쓸까 봐 겁내고 ‘잘못’ 쓸까 봐 도망칩니다. 제대로 쓰고 잘 써야 하는데 정답도 해법도 알 수 없습니다. 쓰면서 헤매고 다 쓰고도 불안하지요. 즐거움을 느끼기도 전에 몸은 움츠러드는 데 먼저 익숙해지고 글 하나를 완성한 성취감을 좌절이 밀어냅니다. ‘내가 무슨 글을 쓴다고.‘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길 바라요. 읽고 쓰기가 힘들고 두려운 아이들과 어른들까지, 쓰는 즐거움과 다른 사람에게 읽히는 기쁨을 누리게 되면 좋겠어요. 글로 쓰지 않고서는 풀어낼 수 없는 문제가, 감정과 갈등과 상처와 이야기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기를. 자기가 쓴 글 속에서 길을 찾아내기를요. 목요일의 작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어느날 우리는 편지를 받겠지요. 모든 요일의 작가들이 서로에게 보낸 편지일 테죠. 나는 또 답장을 쓸게요. 당신은, 그리고 또 당신과, 거기 있는 당신은 쓰기만 하세요. 내가 읽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