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수연 <통영> <나는 바다를 닮아서>를 읽다 쓰다
내 꿈은 늘 바다와 관계가 있다. 밤바다에 가고 싶거나, 마주 앉아 스며드는 달과 눈을 보고 싶거나, 고래를 만나고 싶거나, 다시 태어난다면 바닷속이었으면 하고 꿈꾼다. 잠들어서도 같아서, 꿈속의 나는 바다 한가운데 하염없이 떠 있거나 깊은 바닥에 누워 파란 수면을 바라본다. 실제로는 잠수는커녕 수영도 못하지만. 몸속 어딘가에 바닷물이 있어, 그 물이 돌아가려 하는 것 같다. 바닷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아니 어쩌면 그래서 잃어버린 고향인 양 끈질기게 바다를 향수한다.
이 사람도 그런 건가. 바다 건너 캐나다까지 간 작가가 자신이 태어난 바다로 돌아와 글을 썼구나, 지레 생각해 버렸다. 누군들 안 그랬겠어, 표지와 제목에 모두 바다가 있는데. 소설집 <통영>, 산문 <나는 바다를 닮아서>, 심지어 여덟 작가들과 함께 낸 <선량하고 무해한 휴일 저녁의 그들>까지 다 바다색이다.
하지만 작가는 고향이 싫어서 떠났다고 했는데. 돌아보고 돌아오게 한 건, 지긋했던 공간과 기억이 아니라 사람이었을 테다. 고향 통영에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으니까. 과거를, 힘들었던 기억을 손톱 자르듯 끊어내는 게 어디 가능한가. 거기엔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했던 기억도 엉겨 있는데. 섞인 물감에서 하나의 색만 원래대로 분리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으나.
떠나는 사람은 뒤에 남은 행복을 모르고, 보이지 않는다. 알았대도 달라진 건 없었을 테다. 행복했던 기억이 우리를 살게 하지만 고통은 그 행복마저 버리고 도망치게 한다. 가난은 고통이다. 아니 이건 내 얘기다. 나는 가난이 고통스러웠다. 꿈마저도 가난한 나를 견뎌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작가가 떠나온 통영이 곧 내가 한때 살다 떠난 부산이었다. 작가는 내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목격하고 무수히 해석하고 기억하며, 망각을 허락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나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의 머릿속에서 이미 규정 지어진 내 팔자를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통영> 중에서. 150p
“모두가 모두를 안다고 생각하는 동네였다. 나는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토사물과 똥오줌이 나뒹구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규정 지어진 내 팔자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나는 바다를 닮아서/고메생약주> 중에서. 86p
경부선 기차에서도, 떠나온 집만큼이나 빈루했던 달동네 시민아파트에서도 나는 울지 않았다. 별명이 수도꼭지인 내가 한 번도 울지 않고 일 년을, 아파트가 철거되며 쫓겨간 반지하방에서 또 일 년을 살았다. 두고 온 고통이 시원해서 괜찮았다. 지금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괜찮았다. “아무도 모르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통영> 147p)” 정말 그랬다. 그랬는데,
작가가 나를 그 기차로 되돌려 놓았다. 꺼이꺼이 울었다. 통영을 떠나는 작가의 손을 잡고 아무 말도 안 하고 함께 울었다. 울다 지쳐 배가 고파질 때까지 울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 허기를 자꾸만 자극해 시도때도 없이 냉장고를 열게 한 작가에게 보내는 항의문이다. 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리뷰계의 최강자들이 득시글거린다는 동네 근처에도 안 갔을 거다. 게다가 말이 난 김에 확실히 말해 두는바, 이 글뿐만 아니라 내가 책에 대해 쓰는 모두가 그냥 ‘글’이다. 서평도 리뷰도 독후감도 소개나 추천글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답장이랄까. 책은 작가가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하니까. 잘 받았다고 보내는 간단한 인사다. 나도 글이란 걸 써 보니 알겠더라. 가장 힘이 되는 건 그런 인사라는 걸.
허구헌날 쓰고 죽어라고 써도 아무 답장도 인사도 받지 못한다면 얼마나 힘 빠질 텐가. 시름시름 앓다 절필요양에 들어간 작가들은 얼마나 많겠고. 내 얘기를 대신, 이렇게 잘 써주는 작가를 잃을 수는 없는 일. 비록 나에게 허기를 주긴 했지만 원망은 꾹 눌러두고, 앞으로도 부디 잘 써주십사 바라는 마음으로 인사하는 거다. 이 글을 써주어서, ‘부끄러움을 견디는 용기’를 내주어서 고맙다고.
무엇이 작가에게 소설을 쓰게 하고, 용기를 쥐어짜 ‘도망갈 데가 없는’ 산문까지 쓰게 했는지 나는 모른다.(두 권을 냅다 뭉뚱그려 썼지만 <통영>은 소설이고 <나는 바다를 닮아서>는 산문이다.) 다만, 용기는 독자에게도 필요하단 걸 안다. 작가가 소설로든 산문으로든 결국 자기 얘기를 쓰게 되듯, 독자도 어떤 글에서든 자기 얘기를 읽어내니까. 글과 문장에 자기를 입혀, 보고 싶지 않고 지우고 싶은 이야기를 마주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읽을 수 있다.
언제나 가능한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작가가 먼저 해주어야 한다. 나를 열어 보이고 손 내미는 용기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고마워요. 함께 울어주셔서.
언젠가는 나도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