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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Apr 25. 2023

바람개비 좋아하세요?

에드워드 사이드 <경계의 음악>을 보다 쓰다

평론을 쓰는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그중에서도 음악비평가는 아예 다른 차원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닌가 싶다. 언어를 이용하는 문학이나 연극, 영화 등을 보고 평을 할 땐 사용된 언어를 다시 쓸 수 있으니 조금은 수월하다. 반면 언어가 없는 음악을 듣고 평을 한다는 건, 바람으로 바람개비를 만드는 일 같기만 하다. 그냥 내가 음악에 무지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그런데도, 그러니까 음악을 모르는데도 음악비평책을 곧잘 읽는다. 특히 에드워드 사이드를 좋아한다. 아니 사실 사이드를 읽다보니 음악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잘 모르되 음악을 좋아하기도 하고. 게다가 ‘바람으로 만든 바람개비’에는 의외의 효과가 있어서, 세상에 없던 창조물인 양 아름답고 경이로운 글을 종종 발견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무언의 예술이다. 물론 모든 예술은 각자의 수단을 이용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또한 그 모두가 인간 역사와 현실에 속하는 것임에도, 궁극적으로 예술은 그들 자신에 대한 이야기 이상을 하지 않는다. 모든 예술작품은 침묵의 아이라고 했던 프루스트의 말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일상적인 의미를 가진 언어를 사용한다. 구상예술 역시 영화, 조각, 사진 등의 형태로 현실을 반영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을 모방이요 모사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소리에 의존하고 그 자체로 소리인 음악은 모든 예술 가운데 가장 과묵하다. 시나 소설, 영화 따위에서 얻을 수 있는 의태적 의미를 얻기가 가장 까다로운 예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주자는 음악으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하는 과업을 떠맡아야 한다.

연주자는 일차적으로 해석자다. 음악이 진술이 되는 실현을 돕는 사람인 것이다. 비록 대부분의 해석자들은 그들의 과제를 기교적인 측면에만 한정한 채 효과와 효율만 충족한다면 무슨 방식이라도 상관없다는 자세로 연주를 뚝딱 끝내버린다. 그런 연주들은 일단 바렌보임과 같은 위대한 해석자를 만나고 나면 지극히 시시하고 진부한 것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피아니스트, 지휘자, 교육자로서 바렌보임은 우선 음표를 발견하고, 그것에 굴절, 휴지, 절정, 대화 같은 삶의 요소들을 얹어 생명을 불어넣은 뒤, 마침내 음표가 비롯된 장소인 침묵 속으로 다시 돌려보낸다.

침묵 속에서 음악을 끄집어내는 이 치열하고도 숭고한 과정은 지고의 해석적 재능을 요한다. 이 재능은 그저 음의 실현이나 조탁 차원에 국한되지 않으며, ...음악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고 음악에 진술을 부여하는 위대한 해석자는 거기서 몇 발자국 더 나아간다.

—‘다니엘 바렌보임’ 446p-


예문을 하나 들려고 옮겨 쓰기 시작했는데 끊을 수가 없어 길어졌다. 이런 글을 좋아한다. 책을 읽을 때 다시 읽고 싶은 부분에 인덱스를 붙여 두었다가 문장을 옮겨 적곤 한다. 한데 이 책처럼 표시는 잔뜩 했는데 옮겨쓴 문장은 별로 없을 때가 있다. 다른 문장들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 문장이 많은 경우다. 전에도 사이드의 책을 두고 같은 얘기를 했던 것 같다. 필사한다면 통째로, 종이 말고 마음에 적어 넣고 싶다. 아포리즘 사전 같은 책보다, 문장을 엮어 짠 태피스트리 같은 글이 좋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나처럼 잘 모르는 사람도 에드워드 사이드를 많이 읽으면 좋겠다. 어떤 비평글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지 않고 읽어도 충분히 재미와 의미가 있는데, 이 사람의 글이 그렇다.(음악비평 외 다른 분야의 책도 마찬가지다. 사이드는 다방면에서 활동한 지식인이자 작가였다.) 또 어떤 책은 본문만큼 다른 사람의 서문이나 해설이 좋은데, 이 책은 거기에도 해당된다.


“이런 점에서 사이드의 <경계의 음악>은, 한쪽 페이지는 바다 건너 세계의 음악과 문화를 이해하는 지도이지만 다른 한쪽 페이지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음악과 문화에 대한 ‘번역기’로 참조할 만하다.


물론 사이드가 우리의 클래식 문화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대목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남의 나라 음악 풍경기로 읽어서는 곤란하다. 러시아 여행에 참조하려고 그 길고도 난해한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는 것은 아니잖는가. 그러니 겹쳐 읽고 포개서 들어야 한다.”


마지막에 실린 글이 재미있어서 글쓴이(정윤수)를 찾아 그의 책도 읽어 보려고 적어 두었다. 좋은 작가는 많고도 많고, 읽고 읽을수록 읽을 책이 늘어만 나는구나. 괜찮다. 난 바람개비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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