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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May 14. 2023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 홍소라면.

홍소영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다>를 보다 쓰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이유는 가지가지다. 이 사람은 나랑 닮아서, 저 사람은 나랑 너무 달라서 좋아하게 된다. 물론 이유 따위 없이도 좋아할 수 있다. 그냥 그대라서 좋은 사람도 살다 보면 얼마든지 만난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으며 없어도 된다는 얘기로 흘러가야 마땅할 터인데, 망했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가 너무 많은 거다. 나랑 닮은 듯해서 좋다가 너무 달라서 더 좋다. 결정적으로 내 눈을 별모양으로 만든 건 그의 ’대사(멘트)‘였다.


대사라고 했다. 그의 글을 나는 종종 영화로 본다. 인물과 사건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 읽는 족족 영화 장면이 펼쳐진다는 의미가 하나. 그 자신, 다소 의식하며(“삶 전체가 연극이고 너는 배우라고 생각해라. 그러면 덜 억울해. ..그래도 한 부모라는 포지션이 ‘쓰는 사람’에게는 나쁜 것만은 아니야. 아닌 게 아니라 복이야.” -167,8p)  영화 주인공이 되어 행동과 대사를 한다는 의미가 또 하나다.



그리고 나는 주인공이지 않은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의 감독과 주연 배우는 연인 사이다. 힘든 일이 생기면 둘은 이런 얘기를 나눈다고 한다.

“이건 주인공 서사야. 내가 영화 속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다 해결돼. 너무 쉽게 풀리면 주인공이 아니잖아? ‘이게 다 산을 넘고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면 편안해져.“ -267p



나는 주말의 명화를 동화책과 병행해 보며 환상과 이상을 구축한 어린이였다. 영화 주인공들에게는 다른 장르의 인물들이 범접할 수 없는 능력이 하나 있었으니,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대사를, 심지어 웃으며 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총을 수십 발 맞고도 회심의 미소를 동반한 결정적 대사를 날린다던가, 가족들이 자기만 버리고 여행을 갔는데 울고불기는커녕 도둑이 들었다는 핑계로 맘놓고 집을 때려부수며 해맑게 뛰어다닌다던가.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을 발하는 개그력, 영화의 하이라이트와 쿠키를 만들어내는 눈부신 코믹력을 그에게서 보았던 거다. 홍소작가는 내가 찾던 이상적 주인공이며 저자였던 것. 사랑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슬프고 아프고 기막힌 상황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그녀, 홍소. 팔과 어깨를 짓누르는 생명과 삶의 무게에 땀을 홍수처럼 쏟으면서도 다리로는 개다리춤을 추는 천생 코미디언. 그가 한동안 동굴에 누워 속으로만 외던 대사를 밖으로 날리기 시작했다. 무대에 오른 그녀의 미소가 눈부시다. 두렵고 긴장되어 눈앞이 하얗고 온몸이 와들와들 떨릴 테지만, 그조차 웃겨서 아름다운 춤과 대사로 만들어낼 것을 안다. 홍소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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