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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May 07. 2023

이야기를 말하기

천명관 <고래>를 보다 쓰다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좋진 않았다. 읽어놓고 기억 못 하는 책에서도 문장 몇 개 정도는 기억 나는 법인데 그때 내가 했던 말도 같이 떠올랐다. 덮으며 그랬었지. 재밌네, 근데 더 읽고 싶진 않아. 좋으면 작가의 다른 책을 찾아 읽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유를 말해야겠지. 일단 하나. 소설적 재현으로 넘기기엔 비하의 표현이 너무 많다. 예를 들어 박색. 그 인물이 박색이라고 설명하고 나면 그의 이름은 그냥 박색이다. 박색이, 박색이라, 박색을, 박색한테… 누군가는 해학이라 할지 모르고 그리 볼 수도 있겠으나 이런 말하기 방식이 불편을 넘어 불쾌했다.


말하기, 라고 했다. 이 소설의 이야기 방식은 글보다는 말에 가깝다. 화자는 이야기를 말로 ‘이야기한다’. 문체로 들자면 변사체가 되겠다. 장돌림 변사처럼 이야기를 좔좔 쏟아낸다. 달변으로 청자들을 홀리고 애간장을 쥐락펴락한다. 잠시라도 이야기가 늘어지면 청자들은 자리를 떠버릴 테니 말은 점점 빨라지고 이야기 속 인물들도 필사적으로 뛰어다닌다. 세헤라자데는 애초에 자신이 있었기에 자청해 이야기꾼이 됐다. 목숨을 담보로 잡히긴 했다지만 이야기에 생계를 건 전기수의 절실함도 그에 대지 못 할만큼 가볍지 않다. 이 책의 저자인지 화자인지 변사인지 전기수인지도, 내일이 없다는 듯 숨가쁘게 이야기를 쏟는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무어든 자기에게 중요한 걸 버릴 각오쯤은 해야 한다는 말이 되려나. 독자와 청자의 눈과 귀를 얻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많진 않으니까. 무슨 상을 받니 마니는 별로 안 궁금하고, 이 말글을 번역한 문장이 궁금하다. 이세계에서 포획해온 날짐승처럼 널뛰는 변사체를 다른 나라 다른 세상 말로 어떻게 옮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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