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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린 May 25. 2023

도채비고장

수국 앞에서 쓰다

수국을 도채비고장, 그러니까 도깨비꽃이라 부르게 된 유래를 몇 개인가 들었다. 그중 하나는 제주 온 지 며칠 안 되었을 때 택시기사 삼춘이 해 준 이야기와 관계가 있다.


차를 두고 왜 택시를 탔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아무튼 뒤에 앉아 조수석 등받이를 끌어안다시피하고 시골길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런 분들이 있지만, 동네에선 절대 내비를 사용하지 않는 게 제주 기사들의 자존심인 때였다.


“하우스 앞에서 좌회전해서 밭길로 가다 다리 건너 세워 주세요.”


네, 라고 대답 한 마디 안 하던 과묵한 삼춘 입이 그때 터졌다.


“이디 도채빗불 하영 셨던 내창인게. 알아졈수과?“


좔좔 늘어놓던 이야기를 다 옮길 요량은 없고, 여기가 도깨비 많던 걸로 유명했던 동네라 했다. 밤이면 도깨비불이 꽤나 날아다녀서 해 지면 동네사람들조차 밖에 다니지 않았다나.


지금이사 엇겠주(지금은 없겠지), 옛날 이야기라며 와하하 웃으니 바보같이 어허허 따라 웃긴 했지만 어이없었다. 누가 봐도 갓 이사 온 육짓것이었을 사람한테 굳이 전설의 고향 이야기를 해 줄 건 뭐람. 밤길이니 귀신 따위를 무서워하지 않는 나지만 반대였다면 어쩔 뻔했냐고, 택시가 떠난 후에 억지로 올렸던 입꼬리를 내리며 생각했다.


그 동네에서 4년을 살았지만 도깨비불의 실체가 뭐였는지는 알 수 없었고 그후로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다. 삼춘 말로는 옛날엔 무덤이 많았다고 하지만 당시에는 다른 동네보다 특별히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옛날이야기려니 하고 잊었었다.


한데 그 해 여름, 늦은 밤 걸어서 귀가한 날이었다. 택시로 지났던 길을 그대로 걸어 다리를 지나다 내창가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뭔가를 본 듯해 멈춰섰다.


도채비불, 이란 말을 순간 떠올리게 한 건 반딧불이었다. 반딧불이 몇 마리가 마른 내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작고 희미하며 움직이지 않는 빛도 있었는데,


산수국이었다. 이슬에 젖은 헛꽃이 날개를 접은 아래로 꽃가루가 뿌린 듯 내려앉아 있었다. 보름 근처였고, 자디잔 꽃가루가 튕겨낸 달빛이 설탕처럼 반짝였다. 가로등은 고사하고 민가의 불빛 하나 없는 곳이라 볼 수 있는 달빛, 꽃빛이었다. 그리고 반디의 빛도.


수국이 도채비고장이 된 이야기를 몇 개인가 들었지만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 날 이후 이름만은 또렷하게 떠올리게 되었다. 사람 없는 데 홀로 켜진 도채비불처럼 은은하게 빛나던 꽃빛, 그 위를 고요히 날던 반딧불빛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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