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에르노 <부끄러움>을 읽다 쓰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 (23p)
첫 문장을 읽고 시계를 보니 열두 시를 십오 분쯤 지나고 있었다. 6월이었고, 일요일이었고. 휴일이고 비도 좍좍 오니 종일 뒹굴어 보자며 고른 게 하필 이 책이었을 뿐인데. 반짝반짝 영감의 총애를 받는다던가, 감춰둔 신기가 있다던가 하진 않지만 가끔 묵혀둔 감이 활약할 때가 있는데 그날이었나 보다. 물론 중기기억력(그런 게 있다면)의 도움을 받았을 거다. 책 사기 전 서가에서 훑어봤을 때의 기억이겠지.
친구가 아니 에르노를 좋아했고 나는 폴 오스터를 좋아했다. 왜 우리나라는 페이퍼백이 없냐며 두꺼운 양장본을 읽느라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투덜대노라면, 바꿔 주랴? G는 얇은 책을 팔랑대며 킬킬 웃었다. 짧아서 좋아하는 것만은, 당연히 아니었을 텐데 그가 뭐라 했는지는 잊었다. 몇 권인가의 책을 바꿔 읽으며 G와 닮은 글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단순한 열정>이 인기였고 G는 <남자의 자리>를 읽어보라 했지만 내가 좋았던 건 이 책이다. 에르노의 책 중 하나를 권한다면 <부끄러움>이라고, 몇 번인가 얘기한 적도 있다. 일인칭의 이야기를 삼인칭으로 하는 방법에 대하여, 행위로서의 글쓰기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는 이를 ‘나 자신의 인류학자가 될 것’(48p)이라고 표현한다.
자신이 겪은 이야기만을 하되, 꾸미거나 이미지를 거론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단지 자료로만 취급하겠다는 선언. 그런 글쓰기가 가능할까. 감정이 없는 인간, 인공지능의 글쓰기 매뉴얼에서나 봄직한 말 아닌가. 하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겠다는 거다. 신문을 뒤져 기사를 읽고, 당시 사용했던 언어를 찾아 사전과 목록을 만든다. 그렇게 이야기를 복원한다.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란 ‘우주를 재구성‘(79p)하는 일이다.
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당연히 모든 책이 쓰기에 대한 이야기로 읽힌다. 아니 에르노에게 ‘글쓰기는 헌신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쓰기가 없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부끄러움>의 책머리에 있는 문장이다. 부끄러움을 드러내고 많은 것을 잃으면서도 쓰게 하는 것. 있을까.
덧)
책머리 정수리에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도 있다.
”언어는 진실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우주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이다.“
-폴 오스터 <고독의 발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