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시운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읽다 쓰다
천천히 읽고 있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실 시간에 다 읽을 수도 있다. 맘 먹고 두어 시간이면 책 한 권을 읽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책은 무엇으로 읽는가. 눈으로? 오디오북은 귀로, 점자책은 손끝으로 읽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눈과 귀와 손끝과 뇌세포와 심혈관을 모두 사용한다. 읽는다는 건 그런 것일 테다. 몸의 모든 기관을 써서 마음의 모든 감각에 전사하는 것. 무엇을? 어떤 것이든. 이야기, 세상, 사람, …읽고자 하는 모든 것을.
화장실에서 읽는 책과 도서관에서 읽는 책이 같은 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침대에 누워 반쯤 감은 눈으로 읽을 때와 한나절 중노동을 하다 잠깐의 휴식시간을 쪼개 읽을 때 같은 것을 읽게 될 리는 없다. 늘 여러 권의 책을 번갈아 읽는다. 책에 따라 알맞은 때와 장소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집요하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 진심이라고 바꿔 듣는다. 나는 책에 진심이다.
저자 황시운은 ‘장편소설상을 받으며 날아올랐으나, 같은 해 봄, 달이 밝던 밤에 추락 사고를 당하며 날개가 꺾였다. 그날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끔찍한 통증 속에 남겨졌지만 느리게 읽고 쓰며 살아 있음을 증명하려 애쓰고 있다.‘ (-저자 소개)
부러진 세상에서 남은 건 오직 소설뿐이라는 사람. 통증과 싸우며 한 자를 쓰고 살기 위해 또 한 자를 쓰고, 온몸의 힘을 남김없이 끌어내 전심으로 썼을 글들을 에어컨 바람 시원하고 잔잔한 음악 흐르는 카페에 앉아 커피 홀짝이며 훌훌 읽을 수는 없었다. 타인의 고통을 읽는 건 고통스럽다. 진짜 고통이 아니기에 죄책감도 있다. 힘든 책이다. 그래서 힘들게 읽고 있다. 진심으로 쓴 글을 진심으로 읽기.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