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완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읽다 쓰다
예상되는 외로움과 슬픔이 두려워 미루고 미루던 책을 읽었다. 겪어본 적 없고 하여 짐작할 수도 없는 냄새, 냄새, 냄새가 자꾸만 나서 여러 번 내려놓았다. 창을 열고 커피를 갈고 향을 피웠다. 넘기는 찻물에서 피맛이 나는 듯해 기어이 먹지 못하고 방향제라도 되라고 놓아두었다.
문어는 5억 개 이상의 신경세포를 갖고 있으며 그중 3분의 2 이상이 뇌가 아닌 다리와 몸에 있다 한다. 각각의 다리로 감각을 하고 움직일 수 있어서, 다리로 생각하는 생물인 것은 아닐까 의심을 받기도 한다.
저자는 어쩌면 문어 같은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남들 보기에 묘한 사람. 어떻게 저런 (특수한, 특히 힘든) 일을 할까 싶고, 어떤 마음일까 싶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려운 사람.
매사에 동요가 없고 무감하며 울고 싶어도 눈물 한 방울 내지 못한다는 사람. 하나 어쩌면 이 사람에겐 너무 많은 신경세포가, 뇌를 뺀 몸 전체에 분포되어 있는 건 아닐까. 죽은 몸이 남긴 냄새에 민감한 만큼이나, 슬프고 아픈 마음이 남긴 소리와 온도와 촉觸, 그 모든 기척과 자국을 예민하게 감지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문장이 나올 수 있을까.
“
나처럼 온갖 일을 겪으며 매사에 동요가 없어진 무감한 자보다는 좀 따뜻하고 인간적인 사람과 대화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그가 마지막으로 건 전화였다면 말이다. 죽은 자의 집을 치우는 견적을 정확히 내겠다며 내가 건넨 질문 하나하나가 아직 살아 있던 그의 가슴 곳곳을 예리하게 찔러대는 송곳이 되지는 않았는지, 건넨 단어 하나하나가 자기의 죽음을 실감케 하는 비정하고 뼈저린 암시가 되지는 않았는지. 그저 미안하고, 부끄럽고, 고개 들 염치도 없다. 신이 계신다면, 그 남자가 생전에 의지하고 믿었던 신이 어딘가에 계신다면, 지금이라도 그 품으로 불러 단 한 번만 따스하게 안아주실 수는 없는지. (198p.)
”
문장에도 힘이 있다면.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신과 같은 힘은 아니라도, 무감한 이의 감각과 감정을 움직이고 마른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면. 피울음 대신 적어넣은 문장으로 나 하나쯤은 살릴 수 있기를. 어쩌면 저자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 순간 살아야 했고, 당신을 살려야만 내가 계속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185p)”라 적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