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옷 꺼내입다 글쓰기
옷장 위에 있던 상자를 내렸다. 얇게 덮인 먼지를 후, 부니 날아가다 만다. 쳇, 물티슈를 가져다 닦고 뚜껑을 열었다. 후드티와 조끼, 니트 몇 벌 꺼내니 바닥의 실리카 겔이 보인다. 주황색 티를 코에 대니 희미한 섬유유연제 냄새. 곰팡내는 안 나니 괜찮군, 냉큼 입는다. 꺼낸 옷은 서랍에 넣고 서랍에 있던 얇은 옷으로 상자를 채운다. 내릴 때보다 조금 가벼워진 상자를 제자리에 올렸다.
랩탑을 두들기다 잠시 멈춤. 오른손으로 마신 커피잔을 왼손으로 옮겨 내려놓다 소매가 해진 걸 발견했다. 아까 입을 땐 미처 보지 못했던 부분이다. 윤곽이 무너진 정도가 마침 비슷했을까, 텀블러 표면의 반쯤 지워진 글씨도 함께 눈에 든다. 여태 의식도 안 되던 글씨가 흉해 보여 손톱으로 긁다가, 소매의 솔기를 긁기 시작한다. 실밥과 함께 부풀어 비어지는, 꿰매두고 잊었던 상념들에 아연.
티를 벗어 이리저리 살폈다. 주머니에도, 진동선에도 솔기가 해져 생긴 작은 구멍이 있다. 하나하나는 눈에 거의 띄지 않는데 수가 제법 된다. 한 군데를 꿰매면 이내 다른 곳이 벌어질 거다. 옷의 수명이 다한 거다. 이 계절만 입고 버려야겠다, 어라, 익숙한 느낌인데? 지난봄에도 같은 말을 하면서 꺼내 입었던 거 같다. 많이 낡았네, 몇 번 입고 버리자, 해놓고 빨아서 상자에 넣을 땐 까맣게 잊었다.
지난여름과 오늘 아침은 이미 과거가 되었다. 몇 시간 전에 나는 과거를 개어 넣고 구석에 쌓았다. 미래에 같은 옷을 꺼내며 비슷한 말을 할 거라 생각하니 혼란하다. 미래와 과거가 같은가? 그럼 현재는? 순식간에 과거가 되는 현재, 과거를 입는 미래에 의미란 게 있나? 옷장 위에 상자가 있다. 어제도 같은 모습으로 있었다.
지난겨울엔 대체 뭘 입고 살았담. 새 옷을 좀 사야겠다, 하다가 금세 헌 옷이 될 걸 생각하니 어째 귀찮다. 지겨워진다. 오늘도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텐데 참 따분한 삶이다 싶다. 카르페 디엠은 어디로 갔담.
손목이 간지럽다. 뭐가 간지럽게 하나, 보니 소매의 실밥이다. 아까 긁어댄 솔기에서 몇 밀리미터쯤, 천의 색보다 약간 짙은 실밥이 나와 있다. 이맘때면 피부가 한층 예민하다. 긁으면 덧나니까 연고를 찾는다. 어제보다 조금 더 굳은 연고를, 어제보다 조금 더 힘을 주어 누른다. 하루아침에 겨울이 돼버렸네, 혼잣말을 하다 알았다. 이 하루아침이 오늘이라는 걸. 어제와의 경계, 내일과의 경계란 없지만, 달라진 조금이 오늘을 오늘로 인식하게 한다는 걸. 같지 않아! 틀린그림찾기에 성공한 기분이다. 마음이 조금, 간지럽다.
역시, 새 옷을 사야겠다. 낡은 옷을 버리고 기쁘게 입어야지. 오래 입던 옷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과 색일 테지만, 조금 산뜻해진 옷차림 덕에 오늘을 보내는 마음도 조금 괜찮아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