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처럼 이야기가 왔으면

옛날 이야기처럼 글쓰기

by 시린

내가 태어나서 처음 ‘읽은’ 이야기는 열두 권짜리 동화전집에 들어 있었다. 글자를 알게 되니 읽고 싶었고, 그때 집에 있던 읽을거리 중 아이가 읽을 만한 유일한 책이었다. 1, 2권이 <한국 전래동화>로, ‘선녀와 나무꾼’ ‘콩쥐팥쥐’ 등이 있었다.


공주 드레스가 나오는 안델센 동화나 페로 동화를 제일 좋아했다. 그림이 하나도 예쁘지 않은 한국 전래동화는 재미도 별로 없었는데, 그래도 많이 읽긴 했다. 다른 어린이 책이 없었으니까. 마르고 닳도록 봤음이 틀림없는 게,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흥부놀부’와 ‘아라비안 나이트’의 삽화를 기억한다. 원본이 없어 확인할 길이 없으니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이렇게나 선명하니 크게 다르진 않지 않을까. 어쨌거나 내가 본 ‘콩쥐팥쥐’의 마지막 페이지는 콩쥐가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그림이었다.


그러니 말이다. 어느 날, 콩쥐가 발에 딱 맞는 꽃신을 신고 원님의 가마에 오르는 퓨전사극 콩쥐팥쥐를 봤을 때의 내 표정이 짐작될 거다. 이게 무슨 소리? 언제부터 콩쥐가 신데렐라 코스프레를 하고 있대?? 나는 황당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황당해했다. 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미치고 팔짝 뛰었다. 저기요, 이게 대체 다 무슨 소리죠?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이제 돌이켜보면 뭘 그렇게까지 펄펄 뛰었을까 싶어 부끄럽지만.


전래니, 구전이니가 다 말로 전해지는 거니까 입에서 입으로 이동하다 보면 이야기는 변형될 수밖에 없다. 바뀌고 뒤틀리고 여기에 살이 붙고 저기는 잘려나가고 부풀었다가 쪼그라들었다 딴 데로 한참 갔다가 돌아온다. 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모습을 바꾸고 다른 장소에 깃들어 어떻게든 살아 있다. 한 번 생성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던가? 해서 무한히 팽창한다고밖에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듯, 이야기가 꼭 그렇다.


진짜 놀라움은 이거다. 이야기의 생명력. 예전에는 불변하는 존재만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존재가 변할 땐, 참이 아닌 거짓이거나 약하거나 악하기 때문이라고. 사실도 사람도 변하면 안 되었다. 생각이나 마음이 바뀐다는 건 이전의 것이 옳지 않았다는 증거 아니냐고, 이분법적 사고를 참 명제인 양 여겼다. 그 탓에 흘려버린 즐거움과 아름다움이 얼마나 많을 텐가. 어제의 내가 딱하다.


세상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니,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나가고 다양하게 변주된다는 사실보다, 구석구석 어느 곳에서나 비슷하게 살아 있는 이야기들의 존재가 더 놀랍다. 세상 어디에나 계모에게 미움받는 아이들의 이야기, 가난한 아이를 몰래 돕는 부자 아저씨의 이야기, 꽃으로 핀 엄마와 기다림에 지쳐 돌이 된 연인,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나라를 지키는 존재가 된 영웅의 이야기가 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애초에 하나의 몸으로 탄생했을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경로를 통해 지구 반대편과 극지방까지 퍼졌을 수 있다. 하나, 공기를 타고 이동하던 이야기 분자가 알맞은 기후와 조건을 만났을 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호흡을 통해 우리에게 오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쪽이 ‘옛날 옛적에’ 나 ‘세상 어느 곳에’로 시작하기에는 어울리니까. 어느 날 가만히 이야기가 왔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날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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