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을 사다 쓰다
포기를 먼저 배웠다. 쉬웠다. 원래 내것이 아니었다고 상기만 하면 되었다. 갖고 싶은 게 생기면 포기의 횟수도 함께 늘었다. 도전이니 패기니, 다 남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었다.
기대를 물린 삶이라고 평온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물건 하나 갖기도 쉽지 않았다. 괜찮은 옷 한 벌이 생기면 이 좋은 걸 내가 입어도 되나 망설였다. 결국 옷은 언니 동생들에게 가곤 했다. 깨끗이 본 책과 음반은 친구들에게 선물했다. 그게 맘이 편했다. 미련 한 조각도 남기지 않는 단순한 생활이 좋았다.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 하나 없는 단순한 생활. 편하지만 조금 지루하긴 했던 어느 하루였다. 연말모임에 직접 뜬 목도리를 가져갔다. 선물 받은 이들 중 한 명이 물었다. 당신 거는?
내 건 뜨지 않았다고 하니, 왜 자기 걸 챙기지 않냐고 다시 물었다. 내 생활을 들여다본 사람처럼.
그날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자존감이라는 말로 나를 비춰 보았다. 꿈도 없고 하고 싶은 것 하나 없는 단순한 사람. 편하지만 지루한 날들.
집에 오래 박혀있다 좋아하는 날씨가 온 어느 날, 좋아하는 옷을 입고 나갔다. 좋아하는 책방에 갔다. 서서 책을 한참 읽다가,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 한 권과 예쁜 색의 연필을 샀다.
깎지도 못한 연필은 책꽂이 앞에 오래 놓여만 있었지만, 볼 때마다 좋았다. 빈 마음이 일 밀리미터씩 차오르는 듯했다.
포기 없이 좋아하는 나의 한 가지, 연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