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문패를 보다 쓰다
1980년대 어느날.
곧 아기가 태어날 것 같았다. 외할머니가 시외버스를 타고 오셨다. 종점까지 마중 나가려 했는데 예상보다 일찍 도착한 할머니는 무작정 길을 건넜다고 했다. 종점 건너편 골목에 있는 집이라 했으니 골목까지만 오면 집을 찾을 줄 알았던 거다. 큰소리로 큰애(언니)의 이름을 부르거나, 문패에서 사위의 성씨를 찾거나, 이도저도 안 되면 물어보거나.
생각보다 대문이 많고 문패도 많아서, 할머니의 쌕쌕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당황했을 터였다. 마침 대문을 열고 나오는 둘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그렇게 높고 급했다. 골목길 갈라진 시멘트 바닥에 반가움과 다행한 마음이 뚝뚝 떨어졌다. 내 손을 마구 비비던 따뜻하고 헐렁한 손바닥.
아이구 야야, O서방 이름 찾을라 캤는데 안 비더라, 몬 보고 저 우트막까지 갔다 아이가. 할머니가 못 본 게 아니었다. 우리 집 대문에 붙은 문패에는 주인할머니의 남편 이름만 있었으니까. 오래전에 돌아가셨다는 할아버지가 누군지는 몰라도, 김아무개가 우리가 살던 집 대문의 이름이었다.
언니 이제 학습지 하니까 그거 보면 돼 할머니. 학습지가 뭐로? 이거, 공부하는 거. 대문에 끼와가 있든 거 아이라? 맞다, 이른 종이 끼와가 있는 대문 찾으문 된다 소리다, 엄마. 이 골목에 아-들 있는 집이 여-밖에 없다 아이가. 엄마가 말을 보탰다.
할머니랑 엄마랑 말투가 똑같아서 신기하다고, 조금 후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를 붙들고 킥킥거렸다. 할머니는 엄마의 엄마니까 당연하지! 아니야, 엄마는 우리 엄만데 우리랑은 안 똑같잖아! 어, 그러네? 왜 그러지? 근데 물어보면 왠지 혼날 거 같아서 아궁이에 데운 물에 손을 씻으며 우리끼리만 조잘거렸다.
막내가 세 살이 되던 해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마당에 커다란 나무가 있고 김아무개라는 문패가 붙어있던 집. 주소도 써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대문의 쇠살 모양과, 그 사이 어딘가에 끼어있던 학습지의 컬러, 그것만 또렷이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