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의 이름, 풍경의 이름

간판 앞에서 쓰다

by 시린

시에따이라고 특별히 잘난 것도 없다. 촌보다 나을 바 없는 달동네를 전전하며 살았으니 더욱. 한데 환경에 대한 습관이란 게 무섭다. 아직도 편지봉투 사고 소포 부치려면 차를 타고 가야 한다는 게 불편하게 느껴진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는 문구점도 우체국도 없다.


어떤 날. 볼펜심이 떨어져서 ㅅ에게 물으니 몇 군데를 가르쳐 주었다. 옆 동네에 있는 A문구가 제일 가깝대서 놀랐다. 20분 걸려 갔는데 내가 쓰는 볼펜이 없었다. ㅅ이 제대 가기 전 어디,를 주워섬겼다. 거기까지 가라고? 한 시간 거리였다. 그는 그저 어깨를 으쓱. 여기 서울 아니거든? 싫으면 아무거나 쓰던가, 의 몸짓이었다.


인천문화당? 처음 봤을 때는 뭐하는 덴지 짐작이 안 됐다. 문화원 같은 데야? 영국문화원, 프랑스문화원은 봤어도 시문화원은 못 들어봤다. 게다가 ‘당’이라니? 오래된 빵집, 과자집에서나 본 이름이다. 근데 빵과자를 판다고 보기엔 저 ‘문화’가 걸린다. 대체 정체가 뭐야?


문구점이란 걸 알고 나니 어쩌다 이런 이름이 붙었나 매우 궁금했다. 참 궁금한 것도 많은 인간이다. 한데 볼펜 사면서 슬쩍 물어보기라도 하지 않고, 그만한 숫기조차 없어 매번 얼굴만 붉혔다. 참 쓸데없이 힘든 삶을 자처하는 인간이다.


인천문화당은 인천이 고향인 사람이 만든, 제주에서 제일 오래된 문구점이다. (그렇다고 한다. 이제 물어볼 숫기가 생긴 게 아니고, 주차장 벽에 설명이 붙어 있다. 진작 써둘 것이지.) 이 간단한 걸 알아내지 못해 끙끙댄 시간이 아까울 만큼 단순한 이유다. 먼 남쪽 섬으로 삶터를 옮긴 청년은 고향의 이름이라도 갖고 오고 싶었던 모양.


활자성애자인 나는 마실 중에 간판을 살피는 일이 재미있다. 눈이 가는 간판을 찍어두기도 한다. 풍경 사진을 찍을 때는 활자가 자주 방해가 된다. 하나 이제, 적어도 도시에서는, 활자를 깨끗이 지운 풍경이란 없다. 모든 풍경이 이름과 주소를 달고 있다.


풍경의 이름. 뭔가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날은 모르는 아무 데로 걸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다. 이름을 몰라도, 그런 거 없어도 풍경은 스스로 아름답다. 어떤 날은 활자도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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