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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수 Feb 15. 2022

정의한다는 것

젠 왕,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2019년 비룡소에서 출간된 젠 왕의 그래픽 노블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둥근 선을 드러내는 그림과 이야기들이 강렬하고도 따뜻한 색감과 어우러진다. 이것은 부드럽고 상냥한 사랑의 이야기다.


여기 두 주인공이 있다. 왕자 세바스찬, 그리고 재봉사 프랜시스. 두 사람은 모두 자기 자신이 세상과 들어맞지 않는다고 느낀다.


한 사람으로서의 자신보다 공적인 삶이 중요한 세바스찬은 연애, 결혼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 외교의 일환으로 결혼식을 올려야 하는 집안에서, 세상이 완벽한 남성성의 모범이라 부르는 '왕자'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는 화려한 궁전 안에서 부족할 것 없는 생활을 하지만 어느 날은 그보다 더욱 강렬히 갈망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유로움. 매 순간 자신이 느끼는대로 존재할 수 있는 자유가 고프다.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세바스찬은 남자다운 옷을 입은 왕자였다가도, 완벽한 화장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레이디 크리스탈리아가 된다.

반면 파리의 의상실에서 재봉 일을 하는 프랜시스는 공주가 아니다. 집안이 좋지도 않고 기댈 수 있는 가족의 존재여부도 흐릿하다. 여유로운 삶 대신 그의 머릿속에는 언제나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패션에 대한 또렷한 감각이 있다. 그리고 그 특별한 결과물들은 사람들의 구미를 당긴다. 돈을 벌고 살아가기 위해 주어진 일을 하면서도 잠깐의 틈만 생기면 과감한 디자인으로 세상에 자신을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 프랜시스의 계급적 위치에서 이러한 행동은 생존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에게 옷이란 생존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세바스찬의 일탈도 이와 같다. 가장 가까운 심복 한 사람에게만 자신의 '취미'를 알린 채,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왕자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밤마다 레이디 크리스탈리아의 삶을 산다.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환호한다. 아름답다, 유행의 선구자다, 세련됐다… 그런 목소리들에 손 흔들면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프랜시스가 만드는 옷들은 언제나 과감하고, 고급스러운 복식이 꽉 막혔다고 느껴질 정도다. 그것은 제가 할 일을 제멋대로 정해버린 세상을 향해 프랜시스가 내어보이는 저항이다. 세상의 흐름을 철저히 따라가는 의상실 주인은 프랜시스를 골칫거리로 생각하지만, 세바스찬에게는 오히려 마른 하늘에 내리는 비처럼 반갑다.


말하자면 통 자신의 안위에 도움되지 않는 본성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난 것이다. 우연이라지만 이러한 자들의 결합은 필연과 비슷해보인다. 왕자는 재봉사의 도움을 받아 크리스탈리아로서의 삶에 광채를 더한다. 기묘한 이중생활 속 프랜시스가 크리스탈리아에게 선물하는 것은 단순한 옷 이상이다. 세바스찬은 점점 당당하고, 자유롭고, 과감해진다. 허나 아무리 당당하고 과감하다 한들 이중생활은 이중생활인 것. 밤잠을 희생한 탓에 피로는 늘어나고, 왕실에서는 계속해서 유력한 집안의 딸들과 혼담을 주선한다.


프랜시스의 디자인은 파리의 유행을 선도한다. 크리스탈리아의 아름다움과 드레스의 찬란함이 시너지 효과를 낸 덕이다. 하지만 프랜시스는 패션계에 데뷔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그의 유일한 모델이자 친구인 레이디 크리스탈리아의 비밀이 밝혀져서는 안되고, '더 큰 무대'로 나갔다가는 비밀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은 세바스찬이 왕자이기 때문에 프랜시스는 평등한 위치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없다. 세바스찬이 자신의 옷장에 갇혀있는 만큼, 프랜시스 역시 그 구석에서 움직이지 못한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우정의 무게추는 그렇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왕자와 재봉사는 세상과 다르다는 점에서 닮았고, 그 이질감을 감출 수 있는 바탕의 유무 덕에 완전히 같을 수 없다.

왕자에게는 답답하고 고통스러울지언정 도망갈 장소가 있다. 아닌 척, 일반적인 척 하면 몸 누일 곳은 걱정할 필요 없고 왕실의 일원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마음이 곪는 대신 앞으로의 삶이 보장된다. 프랜시스와는 다르게. 이러한 상황의 차이는 아직 어린데다(십대 중반이다) 세상이 낯설기만 한 두 사람을 끝끝내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각자의 소수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부딪히는 모습을 보다보면 너무 많은 복잡함이 하나의 감정에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히 서로를 대하는 말과 태도 뿐 아니라, 한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세계의 문제가 사적인 갈등상황에 엉켜든다. 이러한 복잡한 갈등을 인문 에세이 따위가 아닌 '이야기'로 옮기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단순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딱딱한 분석보다 갈등 자체의 형상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왕자와 드레스메이커>는 이런 이야기의 힘을 독자에게 선선한 바람처럼 내민다. 작품 내내 정확한 퀴어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 내게는 그랬다. 작가는 세바스찬 왕자를 정의하지 않는다. 그는 트랜스젠더일까? 트랜스 여성으로서 이런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것일지, 아니면 그냥 성별 이분법적인 모든 상황에 저항하는 특이한 남성인 것 뿐일지, 동성애자인지, 이성애자인지, 확고하게 말하지 않는다. 얼굴 표정에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고통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뿐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한 주인공이 계속해서 그려진다. 세바스찬을 바라보는 프랜시스 또한 마찬가지다. 언젠간 얼굴이 붉어지고 언젠간 입을 맞추지만 세바스찬을 로맨틱한 감정을 담아 사랑하는지, 친구로서 사랑하는지 언어로 말해지는 것은 없다. 내겐 이 정의되지 않은 상태의 이야기가 참으로 다정했다.


퀴어는 그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이 정의되기 전부터 존재했다. 존재는 본질을 앞서고 실제는 정의定義보다 먼저 존재한다는 철학이 있다지만 퀴어의 그것은 더불어 언어의 필요가 아주 오래 배제된 결과다. 관측되고 인정받고 이름이 불리기까지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퀴어의 이름은 굉장히 무거운 의미를 갖는다. 이 시대에 퀴어당사자들이 다른 개인과 연결되고, 연대하여 세상을 바꾸는 방법에는 정확한 호명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기도 하다. 누군가를 응원하고 긍정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가 원하는 이름으로 그를 부르는 것. 존재 자체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이름보다도 단순한 행동이, 눈빛이, 자기 자신에게 꼭 맞는 이해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나와 세상이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보다, 나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계속해서 되새기는 일 말이다.

'왕자'의 옷을 입고 평범한 왕자처럼 업무를 보는 세바스찬과 아름다운 드레스 입고 프랜시스를 만나러 가는 크리스탈리아의 모습이 교차될 때 우리는 그가 결국 자유로워졌음을 안다. 정의되기에 앞서 원하는 두 가지 모습으로 거짓 없이 설 수 있는 순간. 세바스찬 역시 그러한 마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결말부에 다다랐을 때, 왕자의 집사와 아버지가 드레스를 입고 런웨이에 모델로 서는 장면이 지나간다. 왕은 무대 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쇼는 두 사람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진행될 것이다. 자, 그럼 이만. 이제는 내가 무대에 설 차례라서.”
 - <왕자와 드레스메이커> 중에서.


그가 왕이기 때문에, 그리고 세바스찬이 왕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이겠지만 어쨌든 왕은 “두 사람이 원하는 모습 그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선언한다. 관객들은 낯설어한다. 독자들 역시 낯선 옷이 낯선 몸에 입혀져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세바스찬 왕자처럼 세상에 혼란을 겪고 있지 않은 남자들이 이 일에 동참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헷갈릴 수도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정의되거나 납득될 정도로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세바스찬 왕자는 인정되었다. 이 장면으로 그는 아버지에게, 또 쇼를 보고도 비난하지 않은 모두에게 받아들여졌다. '퀴어 정체성'이라는 말이 없이도 말이다. 뭐, 그럴 수도 있는거겠지. 그러려니, 하면서…


‘퀴어함’의 세계는 애초에 보편의 언어로 완벽하게 정의될 수 없기 때문에 ‘퀴어(이상하다)’라는 정의를 얻는다. 일반적인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정의를 고심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 애쓰지만, 애초에 이 노력은 우리가 속할 수 없는 정상의 세상을 단위로 하는 일이다. 큐브 조각을 직소 퍼즐 판에 끼워넣는 꼴이다. 언젠가는 큐브도 직소 퍼즐도 새로운 형태로 재정립되어 하나의 덩어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날을 꿈꾼다. 하지만 아직 거기 도달하지 못한 지금, 작가는 과감히 어떤 단계를 지나쳐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용어를 설명하는 단계를 지나치고, 세바스찬의 삶과 그것을 보는 프랜시스의 시선은 어떠한지만을 보여준다. 불필요한 나레이션도 사족도 없지만 우리는 그림의 흐름에서, 표정과 대사에서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고통받고, 사랑하고, 성장하고 변화해 세상을 한층 더 '새로운 덩어리'로 바꾸었다는 것을.


프랜시스와 세바스찬 왕자는 서로를 정의된 이름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세바스찬과 프랜시스 그 자체를 이해한다. 지금 이 시대의 삶이 그럴 수 없다 할지라도 아무렇지도 않게 다정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위로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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