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수 Jan 15. 2022

느슨함을 채워 넣기

김보영, <얼마나 닮았는가>

 


앞표지에선 행성에서 고개를 내민 두 인간이 입을 맞추고, 뒤표지에 파란 우주에는 샛노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우주 예찬을 하고 싶어서 인간 세상에 방문한 중단편의 신”. 기묘하고 분명하지 않은 만큼 또 고개를 주억거리게 만드는 힘이 있다. 불분명함이 가지는 안정감이란 신앙으로 가장 쉽게 대표되지 않는가. 암, 정말 그렇지. 김보영 작가는 내게도 꽤 오래 그런 존재였다. 〈땅 밑에〉, 〈다섯 번째 감각〉등 놀라운 세계를 소개해주는, 한계가 없어 보이는 글의 주인.


판타지, 특히 SF라는 장르의 첫인상은 아무래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낯섦'일 것이다. 해리포터나 스타트렉 같은―영화로 치자면 특수 분장이나 컴퓨터 그래픽이 사용되는―일상과 전혀 다른 곳에 있을 것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김보영 작가의 글은 이같은 장르의 제목을 달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다른 결을 지닌다. 인터넷에서, 지면 위에서 만난 그의 글은 매번 새로운 환상을 담으면서도 일상과 밀착되어 있었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소재가 일상적이라기보다는 이를 구성하는 갈등, 문제의식, 눈물들이 일상적인 까닭이다. 내면세계와 인간성이 유일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이 특히나 그렇다.


출판사 아작에서 2020년 말 출간된 소설집 〈얼마나 닮았는가〉역시 낯설면서도 익숙하다. 제목은 뒤에서 두 번째 단편에서 따온 것이지만, 이 구문 자체를 다른 단편들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어 소설집 제목으로 정했겠거니 싶다. 모두 이 세상과 나 사이의 연관성과 이질감을 읽어내고 질문하게 만든다.


이 세상의 빛 잘 들지 않는 구석지와 나는 얼마나 닮았는가. 이 세상의 불합리함은, 불확실함은, 가능성은 나와 얼마나 닮았는가? 읽는다는 행위는 이러한 맥락을 넘어, 그곳에 없는 이야기조차 알아차려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 소설집에는 상상하고 채워 넣을 수 있는 느슨한 세상이 있다. 소설집에 수록된 세 번째 단편 〈빨간 두건 아가씨〉는 그중에서도 유별한 이야기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자그마한 아가씨다. 붉은 체크무늬 두건에 가슴에 큰 리본이 달린 붉은 원피스와 빨간 구두를 신고 장바구니인 듯한 천 가방을 양손에 꼭 쥐고 있다. 화장을 과하게 한 탓에 얼굴이 하얗게 떠 보였다. 아가씨는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침을 삼키고는 경직된 발걸음으로 시선을 외면하며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 빨간 두건 아가씨 중에서.     


초입부터 여성이 얼마 남지 않은 세상을 걷는 아가씨가 등장한다. 삼성이 인공 몸을 만들어 팔고,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몸을 갈아 끼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뒤쳐지거나 낙오되지 않으려는 욕망이 극대화된 불가능의 세계다. 하지만 이렇게 과감히 현실을 건너뛰면 그 안쪽 숨겨진 이야기가 보인다. 아가씨는 왜 길을 걷기만 해도 두렵고, 불편하고, 무슨 위험한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데도 여자로 남아있기를 선택한 걸까? 


이 시대에 성별―특히 남녀 두 갈래로 나뉘어진 방식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성차별이라는 문제가 나날이 대두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성별이 목소리의 기준, 몸의 기준, 스스로를 가꾸는 기준, 행동거지의 기준이 되며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으면 모난 돌 되어 정 맞기 십상이다. 외모지상주의와 고정관념이 똘똘 뭉쳐 도달할 수 없는 완벽을 끝없이 그려낸다.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꽤나 고달픈 일이라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고달픈 인간상을 여성으로 인식되게 하는 것은 드러나는 몸의 형태다. 이데아와 다르다고 하여도 일정한 틀 안에 속해 있다면 여성으로 인식된다. 여성은 만들어지는 존재라 하지만 만들어지기 이전 여성으로 선택될 때에는 골격 따위의 두루뭉술한 형태가 중요하다. 그럼 그 형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고달픈 세상을 탈출하는 일일까? 김보영이 구성한 세상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미 산재한 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몸의 형태는 수단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수단의 변화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빨간 두건 아가씨〉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성의 몸으로 살기를 선택한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것이 이유다. '여성의 몸'에서 탈출한 자들은 억압의 무게를 더할 뿐이고, 탈출하지 못한-않은 자들은 정 맞아 사라진다.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남겨진 것들은 더욱 열렬히 얼마나 불완전한지 평가당한다. 그는 선명히 말했다. ‘난 여자니까요’. 굉장히 단순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실이다. 빨간 두건 아가씨는 그냥 자신대로 살았을 뿐이다.


김보영이 그려낸 빨간 두건 아가씨는 당당하지 않다. 당당하지 못하다. 세상 전부가 지뢰밭인데 어떻게 아무 위협도 느끼지 않는 양 살아갈 수 있겠는가. 도망치고, 불안해한다. 도망친 곳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하다.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택시기사는 마트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하나 다르지 않게 빨간 두건 아가씨의 여성됨을 보고 싶어 한다. 그 또한 자기 머릿속의 여성성과 아가씨가 일치하지 않는 순간 당혹스러워하며 그 차이점을 수정하고 싶어 한다. 마치 자신에게 그럴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아가씨 내내 쪼그라들어 있지만은 않는다. 해야 하는 말은 하고야 말고, 벗어나야 할 자리는 벗어나고야 만다. 조용하고 소심한 반격이 거기 있다.


아가씨는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대체 뭐가 문제예요?”
“나에 대해 말하는 거요.”
아가씨의 말에 기사가 입을 다물었다.
“떠들고 싶으면 차라리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나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차라리 물어봐요. 그리고 내가 말하는 걸 들어요.”
 - 빨간 두건 아가씨 중에서.     


세상은 이처럼 자아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박하고, 돈이나 권력의 논리를 사용하는 자들에게 후하다. 여성을 위한 복지가 점점 부족해지는 세태를 지적하면 누군 남자가 되고 싶어서 되었겠느냐는 역정이 돌아온다. 현실적이거나 일반적인 기회, 세상이 세워둔 정도正道를 좇지 않는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일도 거리로 나온’다. 자신들을 박해할 세계의 눈에 띄고 만다. 얼마나 위험하고 얼마나 난감해지든 살아있기 때문이다. 밥을 먹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생필품을 구해야 한다. 그렇게 매일매일 위협과 마주한다. 김보영은 이렇듯 세상을 바꿀 줄은 모르지만 박멸되지 않고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 말한다. 불친절과 고달픔에도 '여성됨'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자들을 긍정한다. 이 단편은 여성성에 대한 하나의 굳건한 긍정이다.


긍정을 이해하였다면 다음은 비현실에 집중할 차례다. '몸을 쉽게 바꿀 수 있음'은 정말로 무엇을 의미할까? 이야기를 꼭꼭 씹어 삼킨 뒤 그 힘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빨간 두건 아가씨〉가 닿을 수 있는 새로운 맥락이 있다.


성별을 바꿀 수 있다는 설정을 집어넣은 세상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전면에 세우지 않는 것은 교묘하다. 성별의 변화를 신체의 변화와 연결해놓곤 성별 불일치감Gender Dysphoria의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 역시 참으로 시스젠더 중심적인 방식이다. 선택되는 남성 권력과 사라지는 여성성이라는 '사회적 욕망'이 당연하다는 서술은 젠더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혐오적 논리와도 쉬이 연결된다. 버스정류장의 광고 문구인 『태어난 그대로의 성으로 삽시다』라든지, '진짜 여자'라든지, 교정의 여자화장실이 사라지는 문제에 대한 언급들이 그렇다. 무게 없이 스쳐 지나는 짧은 묘사지만 젠더 퀴어 당사자에게는 익숙하고 또 고단하다. 수년간 MtF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악마화하며 사용된 근거들과 맞닿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빨간 두건 아가씨는 여성임을 드러내는 것이 스스로를 위협에 빠뜨리는 것과 같은 행위인 시대에 리본 달린 원피스와 체크무늬 두건을 걸쳤다. 모두 그것을 박해할 때 오롯이 그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낯설지 않은 이야기다.


아가씨는 단순하다. 여자이기 때문에 여자로 살아있다. 붉은 옷을 입고 싶기에 붉은 옷을 입고 외출한다. 이 단순명료함은 이야기 속에서 너무도 강렬하고 이질적이라 잿빛 세계의 유일한 빨강처럼 빛난다. 완벽한 돌출과 과장. 그것은 이미 퀴어한 수행이다. 몸을 바꾸는 것이 훨씬 쉬운데도 어려운 길을 택하는 것, 불안과 폭력에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여성성 수행을 계속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기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심정적 확신. "나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차라리 물어"보라는 말은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자 하는 소수자의 용기다. 하여 우리는 이 세계의 이야기를 결벽한 여성성 비판에서 멈추지 않고 그 너머를 읽을 수 있다. 세계가 '알지 못하는 존재들'을 포용하도록 경계를 확장시키면서. 해당 단편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배제적 기류에도 불구하고 빨간 두건 아가씨는 시스젠더 여성과 트랜스젠더 여성의 경계를 흐리는 존재다.


이렇게 한 명이 거리를 걷는 모습을 보면 한 명이 더 용기를 낼지도 모르지. 어쩌면 그다음 날은 두 명일지도 몰라. 모레는 열 명일 수도 있겠지. 집 안에 숨어 있던 여자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면 서로를 보며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그렇게 거리가 여자로 넘쳐나면 나는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그때가 오면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뭘 묻거나 뭘 하라고 말하는 걸 듣는 일 없이 거리를 걸을 수 있겠지.
아가씨는 내일도 거리로 나올 생각이었다.
 - 빨간 두건 아가씨 중에서.     


아가씨는 집 안에 숨어 있는 여자들을 생각한다. 언젠가는 길거리로 나와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을 여자들.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여성스럽거나 여성스럽지 않거나 상관없다. 어쩌면 그 여자들 중엔 '날 때부터 여자는 아니었지만 여자 몸을 입은' 자도 있을 것이다. 인공 신체 판매 소식에 돈을 모아 몸을 사 입고도 세상이 여성에게 다정하지 않아서, 안전하지 않아서 집 안에만 처박힌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뿐인가? 구닥다리 기술이 되었을 트랜지션을 이미 온몸으로 거친 여자, 스타일링이나 호르몬을 통해 '일반인 사이로' 녹아들어 가는 패싱의 단계를 이미 통과한 여자, 여자로 사는 것이 하등 좋을 것 없는데도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도무지 무시할 수 없는 수많은 여자들이……


빨간 두건 아가씨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들 모두가 자기 행동에 힘입어 거리로 나오는 날을 상상하는 존재다. 작가가 호명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들은 언제나 거기 있을 것이다. 하여 이 세계의 '한계 없는 여성성'은 연대할 수 있는 기질 그 자체가 된다. 어떤 조건에 의해 합의나 협력하여 이득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목적하였다면 여성성은 전부 버려지는 것이 맞지 않나. 스스로 존재하길 선택한 자들은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길거리로 나올 수 있게 한다. 여성성이라는 거대한 바다에 '선택'이라는 조건 한 방울이 더해져, 이 단편은 새로운 방식으로 특별해진다. 나는 〈빨간 두건 아가씨〉의 애매모호함에서 단순한 확신을, 누군가를 논리적으로 설득할 수도 없고―설득할 필요도 없는 정체성에 대한 긍정을 읽는다. '우리'를 위해 매일 거리를 걷는 아가씨들이 책 속 세계에, 그리고 2022년 현재의 세계에도 존재함을 생각한다. 읽어냄으로서 힘을 얻는다.

작가의 이전글 다듬은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