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진,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너무도 빠른 시대가 오래 전에 열렸다. 많은 정보가 인터넷에 쏟아지고, TV나 라디오에서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책이 쌓여가고 종이에 찍히는 글자들은 하루에도 몇만 자 몇억 자가 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홍수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론은 어떤 이야기를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세울지, 얼마나 자주 세울지를 결정할 수 있으며, 그런 식으로 대중에게 도착하는 이야기들은 '진실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가공된 것. 몇 번이고 걸러진 것이, 이득을 얻고자 하는 의도대로 구성된 것이 우리에게 닿는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의도를 그대로 전달하기도 하지만 생각할 수 없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기도 한다. 불편한 것은 가리고, 미묘하게 비틀린 진실을 쉽게 받아들이고 체화하도록 돕는다. 확성기를 가진 자들은 점점 더 많은 청자를 마련하고, 목소리 하나 뿐인 자들은 요란한 굉음에 밀려 변두리로 떨어진다.
말해지지 못하고 알려지지 못하는 것들의 구분이 점점 뚜렷해 질 것만 같은 시기다. 소수자, 약자들이 밀려나고 기득권, 강자들이 끝없이 말한다. 그들의 언어는 숫자와 예의에 감싸여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우리가 진실과 유리되어 확성기와 권력을 쥔 자들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지는 않을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콩나물처럼 고개를 들이밀고 어찌해야 하나 서로를 부여잡는 모습이 보인다. 나 역시 그 콩나물 시루에 끼여서 혼란스럽다. 이런 혼란 속에 나는 끝없이 진실된 말들을, 직접적인 언어들을 소개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이유진 작가의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역시 계산되지 않은, 터져나오는 말들로 우리에게 힘을 준다.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는 아토피 환자로서 삶의 경험을 자세하고 대담하게 풀어낸 책이다. 작가는 '정상'범주에 들지 못한 몸의 언어가 세상의 것과 맞지 않음을 드러내며, 그런 순간들이 겹쳐질 때 한 인간의 안팎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가족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친구들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세상을 응시하는 방법은 어떠한지, 그리고 그들 전부가 '나'에게 되돌려주는 시선은 어떠한지.
비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기준으로 편리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끝없는 불편함과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유진 작가는 그것을 단순 불편함 뿐이 아니라 고통, 통증, 생명의 위협 따위로 드러낸다. 그의 몸이, 그의 정신이 결국 말할 수 밖에 없는 알맹이와 같은 것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어쩌면 이해하지 못할 부정적인 감각들이다. 이 책은 존재한다는 행위 자체가 엄청난 투쟁임을 우리의 일상과 가까운 언어로 설명한다. 그에 그치지 않고 ‘몸’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많은 것을 담고 있는지를 환기한다.
작가는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방문했던 운전 학원에서 강사가 운전대 위로 손 겹치며 불필요한 접촉을 시도하는 것을 기억한다. 기이한 것은, 잠시 후 아토피 증상으로 인해 ‘괴물’같은 손의 형태를 발견한 강사가 몸시 당황하며 눈을 피했다는 것이다. 뒤이어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성추행도 하기 싫은 몸이라니 좋아해야 하는 건가? 성추행범도 혐오하는 몸이면 여자로서 안전하게 살 수 있으니 다행하고 기쁜 일인가?’
몇 년이 지났건만 이 물음은 아직 해소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늘 함께하지만 낯설기만 한 나의 몸, 내 것이면서도 끊임없이 불화해온 이 몸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여전히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이렇게 분열되고 어긋난 나와 몸의 관계를 이제는 이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서툴더라도 죽기 전에 화해해보고 싶어서.” 이것이 내가 40년 만에 몸에 대해 더듬거리며 말하기 시작한 이유다.
-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 중에서.
몸과 나의 관계가 어긋났다는 느낌. 이 어긋남이 세상에서 나만을 예외로 만들 때 느껴지는 혼란. 이유진 작가의 몸이 겪는 물리적 고통을 나는 알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온기를 느꼈다. 몸과 나의 관계가 어긋나있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값지고 뜨겁다. 뜨겁게 불타는 것은 연료의 역할이고, 이 연료는 변화를 부추긴다.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보여진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시선의 유통기한은 끝없다. 적어도 21세기에는 사람들이 서로의 외형을, 목소리를, 태도를 끝없이 관찰하여 저 사람은 얼마나 익숙한지 저 사람은 얼마나 낯선지 평가한다. 얼마나 정상인지 비정상인지를 확인하고, 비정상일 경우 그는 순식간에 일상적이고 편안한 것에서 멀리 떨어지게 된다. 위협적이지 않아도 위협이 되고, 위협이기에 배척해도 괜찮은 것이 된다. 배척이 모이면 '낯선 몸'과 불화하는 인간들은 대다수가 편리하다고 여기는 편의시설을 선뜻 사용할 수 없다. 다들 아름답고 쾌적하다고 생각하는 곳을 두렵고 멀리 있는 공간으로 여기게 된다.
깔끔하게 잘 정돈된 공간일수록 낯선 감각은 강해진다. 소속되지 못한 공간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이러한 ‘제거’는 규칙이나 힘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고 ‘눈치’로 이루어진다. 대다수의 수요는 소수의 일상을 침범한다. 직접 떠나라 종용하지 않는다 하여 괜찮은 것이 아니다. 가해자 개인보다 피해자 개인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방식이다.
작가는 아토피 환자들 사이에서도 병증이 심하고 덜 심하고의 차이를 느낀다고 했다. 각자 다른 기준을 가진 환자들이 몸 상태를 기준으로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거나 상대방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얼마나 정상에 가깝거나 비정상에 가까운지 재어보며 '몸'과 끝없이 싸우는 것이다. 싸움을 지속하는 데에는 에너지가 필요한데, 싸움을 지속시키는 것은 세상 그 자체다. 세상을 구성하는 '우리'는 모두 개인이 감당할 필요 없는 이러한 ‘어긋남’에 일종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시선의 유통기한은 끝없다. 아무리 편견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언가를 응시하는 순간 파악하고 반응하는 것은 아주 빠르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의식적으로 ‘어긋난 것들’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징그러운’ 병증이라면 환자에게도 책임이 있을 것이라는 반응, 성별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은 제정신이 아닐거라는 반응. 이런 반응의 폭포 속에서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몸과 영혼의 관계를 끝없이 움직이고 침잠하지 않도록 한다.
<몸이 말하고 나는 쓴다>은 제목에서부터 본문에 드러날 직설을 경고했다. 불일치를 끝없이 말하는 것은 몸이고 그것을 언어로 옮겨 쓰는 것은 나라는 사람이라고. 완벽한 결론을 내거나 논리를 세우지도 않으나 몸의 말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것은 대놓고 불편한, 매끄럽지도, 씹어 삼키기 좋지도 않으니 필연적으로 확성기를 가질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크게 울리는 확성기나 마이크가 없는 곳엔 부러 손을 뻗치는 사람들이 있다. 책을 펴낸 독립출판사 다른길이 그렇고, 기꺼이 몸의 이야기를 옮긴 이유진 작가가 그렇고, 이야기가 독자를 찾을 수 있게 창구를 마련하는 독립서점과 작은 서점이 그렇고, 이 이야기를 어느 날엔간 펼쳐 읽을 당신이 그렇다.
빠르고 넓게 확산되지 않는 대신 분명하고 정확한 목적지에 다다르는 목소리가 필요한 날들이다. 그 목소리들이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바라보고 보여지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며 설령 상처를 주고받더라도 계속 존재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