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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靑出於藍)

by 권옥순

청출어람(靑出於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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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시인 김삿갓의 풍류를 간직한 충절의 고장 영월 읍내에는 초등학교가 셋 있다. 1980년대 중반 그중 가장 학급 수가 적은 초등학교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학교별로 등위가 매겨지는 중학교 반 편성 배치 고사에서 우리 학교는 늘 하위권이었다. 6학년 담임을 맡은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성적을 올리기 위해 정규 수업이 끝난 후에도 보충 수업을 했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하기에, ‘지·덕·체’를 고루 갖춘 인성 교육에도 중점을 두고 지도함을 잊지 않았다. 3월 초, 시골 분교에서 K가 전학을 왔다. 부모님을 떠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과 함께 자취생활을 했다. 키가 크고 야무져 보이지만 마음이 착한 ‘순둥이’였다. 전에 다니던 분교에서는 매일 축구하며 놀았는데 여기서는 공부를 많이 해서 공을 차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하나를 가르치면 둘, 셋을 깨우치는 영특함과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남달랐다. 매월 치르는 월말고사가 있었는데 3월 첫 시험에서 2등을 해서 모두가 놀랐다. 점차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며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이 길러져서 4월부터는 계속 1등을 했다. 공부뿐만 아니라 친구들을 배려하며 예의 바르게 행동하였다. ‘바르고 성실하며 밝고 튼튼하게’란 급훈과 ‘최고가 아닌 최선을 다하자’며 인성 교육과 학습을 중시했던 나를 흐뭇하게 하였다.

조카와 친구인 K는 우리 집에 자주 와서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였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떠나 생활하는 것이 안타까워 잘 챙겨 주었다.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결과, 중학교 반 편성 배치 고사에서 조카와 함께 둘 다 만점을 받았다. 덕분에 늘 하위권이었던 우리 학교는 1위를 해서 경사가 났고, 둘은 중학교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성실한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된 것도 기뻤지만,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집안의 부모님 고민이 덜어진 것도 감사했다.

K는 과학 고등학교를 거쳐 기계공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논문을 가지고 조카와 함께 설날에 세배한다고 찾아왔다. 오랜만에 멋지게 성장한 모습을 보니 대견하고 뿌듯했다. 성실히 노력한 제자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그런데, 우연히도 나의 초등학교 친구가 총장인 대학에서 근무한다니 더 반가웠다. 총장 친구의 초대로 대학에 가는 날, 동양란과 떡을 배달시키고 들뜬 마음으로 출발했다. 서울의 G동은 내가 45년 전에 살던 곳인데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어 예전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대학에 도착하니, 주차장에서 멋진 신사가 “선생님,”하며 달려왔다.

제자를 만난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하고, 총장실로 가는 동안 마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같이 행복했다. 우리는 총장실에서 차를 마시고 사진도 찍으며 그 시절로 돌아가 추억의 페이지를 하나둘씩 넘겼다. 친구는 “K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존경받는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교육자입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인성이 훌륭한 제자는 몸 둘 바를 몰라하며 공을 내게로 돌렸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6학년 때 선생님과 중학교 때 선생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제자의 말에 “자넨 언제나 ‘못해요.’ ‘안 해요.’ ‘싫어요.’가 없고 무조건 ‘예.’였지. 그리고 항상 겸손하고 성실했는데 지금도 그 모습이 여전하네.”라고 내가 말했다. 이날의 대화는 감사와 따뜻한 정이 오가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몇 달 후, 정년퇴임을 앞둔 나를 축하하기 위해 50년 지기 친구와 제자가 학교에 찾아왔다. 그들의 방문은 큰 기쁨이었다. 지난 세월 속에 이어진 인연의 아름다움과 교사로서의 보람을 흠뻑 느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은 ‘푸른색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스승에게 배운 제자가 자신을 가르쳤던 스승보다 학문이나 실력이 더 뛰어나다’는 의미이다. 교직에서 나는 그 같은 행복을 겸손하고 실력 있는 K 덕분에 흠씬 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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