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
오랜만에 중학교 친구와 연락해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친구는 최근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나의 문어 선생님(My Octopus Teacher)』을 인상 깊게 봤다며 말문을 열었다.
다큐의 내용은 이랬다. 촬영감독으로 일하던 남자가 건강을 위해 매일 바다 수영을 하던 중 우연히 한 마리의 문어를 만나게 된다.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 문어를 관찰하며 깊은 교감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였다. 친구는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난 후, 도저히 문어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친구는 식단을 조금씩 채식 위주로 바꾸고 있다고 했다. 지금은 붉은 고기를 완전히 끊었고, 앞으로는 닭고기 섭취도 최대한 줄여나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먹게 될 수도 있겠지만, 가능한 한 노력할 거라고 강조했다.
그 말을 듣자, 예전에 봤던 기사가 떠올랐다. 붉은 고기가 다른 육류에 비해 훨씬 많은 탄소 배출량을 유발한다는 내용. 환경을 위해 비건이 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소고기만이라도 줄이는 것이 의미 있는 선택이라는 것이 기사의 골자였다. 그 후 소고기를 먹을 때면 마음 한구석에 약간의 죄책감이 자리 잡았지만, 좋아하는 고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결심은 대단했지만, 그저 감탄하는 데 그쳤다.
며칠 뒤, 우리는 약속 날짜를 정하고 함께 갈 식당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자리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었지만, 고기가 들어간 메뉴를 제외하니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금방 배가 꺼지는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대단하다고 느꼈던 친구의 신념이, 순간 조금은 번거롭게 느껴졌다.
2주 간의 농촌 캠프에 참여했을 때, 채식을 제대로 경험하게 되었다. 캠프에서 새롭게 알게 된 세 명의 친구 중 한 명이 비건이었다. 그 친구는 고기나 해산물은 물론, 치즈와 우유같이 동물에게서 나는 재료도 먹지 않았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비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외식이나 회식 자리에서 먹을 수 있는 메뉴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 그럴 때마다 원치 않게 눈치를 보게 된다는 것, 심지어 양념이나 육수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동물성 재료까지 일일이 가려낼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이전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과자도 마찬가지였다. 짭짤하고 감칠맛 나는 대부분의 과자에는 육류나 해산물에서 추출한 시즈닝이 들어 있었다. 마트에서 비건이 먹을 수 있는 과자 종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감자칩, 고구마깡, 꼬깔콘, 사또밥 정도가 그나마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과자였다. (사또밥 봉지에 비건 인증 마크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함께 생활하면서 억지로 식단을 맞추려고 노력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그 친구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게 되었다.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고기와 조금씩 멀어지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하면, ‘그럼 무슨 재미로 밥을 먹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하지만 막상 캠프에서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해보니, 생각보다 훨씬 다채롭고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다.
하루는 다 같이 야채 바베큐를 해 먹기로 했다. 애호박, 양파, 방울토마토, 새송이버섯, 대파, 팽이버섯 등을 숯불 위에 올려 구우며, 시원한 맥주를 곁들였다. 고기 한 점 없었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며 야외에서 숯불에 구워 먹으니 제법 ‘바베큐’ 분위기가 났다. 애호박의 달큼함과 부드러움, 방울토마토의 상큼함, 새송이버섯의 담백함까지, 각각의 음식 재료가 가진 개성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특히 숯불에 구운 대파는 향긋함이 일품이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구운 파 향과 살짝 탄 부분의 감칠맛은 고기 없이도 훌륭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신기하게도 속이 더부룩하거나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평소 고기 바베큐를 먹고 나면 몸이 무거워져 느릿느릿 걷게 되고, 배에 가스가 차곤 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불쾌한 포만감이 없었다.
또 다른 날에는 밭에서 직접 기른 가지를 활용해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가지와 새송이버섯을 도톰하게 썰어 격자무늬 칼집을 내고, 대파와 청양고추는 채 썰어 준비한다. 진간장, 물엿, 맛술, 다진 마늘, 참기름, 물을 섞어 양념장을 만든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가지와 버섯을 앞뒤로 노릇하게 굽는다. 어느 정도 색이 올라오면 양념장과 야채를 넣고, 소스가 자작해질 때까지 졸여내면, ‘가지 버섯 조림 덮밥’ 완성!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가지는 부드러웠고, 버섯은 쫄깃쫄깃해 마치 관자를 씹는 듯한 식감이었다. 칼집 덕분에 양념이 속까지 잘 배어들었고, 짭조름한 소스를 갓 지은 밥에 비벼 덮밥처럼 먹으니 아침인데도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이 메뉴가 너무 만족스러워 캠프 마지막 날에도 덮밥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이번에는 시원한 오이냉국까지 곁들였다. 오이, 양파, 청양고추를 채 썰고, 불린 미역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시원한 물에 소금, 설탕, 식초를 1:1:6 비율로 넣고 간을 맞춘 후, 썰어둔 재료를 넣고 깨를 뿌려 마무리했다. 먹기 직전 얼음을 동동 띄우면, 속까지 시원해지는 여름 별미가 완성된다.
캠프에 있는 동안, 동물성 재료를 아예 먹지 않은 건 아니었다. 조갯살이 들어간 된장찌개도 먹고, 카페에서 라떼도 마셨다. 고기가 없어도 식사는 충분히 즐거웠고, 오히려 몸이 가볍고 기분 좋은 날이 많았다.
캠프가 끝난 후에도 2주에 한 번은 ‘채식의 날’을 정해 실천하고 있다. ‘고기를 안 먹는다’가 아닌 ‘덜 먹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니 식단 선택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비빔국수, 야채 비빔밥, 고추장 두부조림처럼 평소에도 좋아하던 메뉴를 활용하니 어렵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괜히 건강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덤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비건 식당을 찾아가기도 했다. 비건 식당에서 먹은 라구 파스타는 고기 없이도 라구 소스의 깊은 풍미와 다진 고기 같은 식감을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함께 주문한 버섯 모짜렐라 피자와 크림 리조또 역시 고기가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맛있었다. 먹어보기 전에는 ‘과연 고기 없이도 만족스러울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음식을 한 입 맛보는 순간, 그런 걱정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비건 식단이란 신념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로만 생각했는데, 막상 경험해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거창한 실천이 아니라 일상을 구성하는 자연스러운 습관이기도 했다. 함께 밥을 먹고 일상을 나누면서, 굳이 그 신념을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지 않아도 존중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완벽하지 않아도 나만의 방식으로 조금씩 실천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조금은 느슨하게, 자신만의 속도로 지속하는 것이 하루의 완벽한 실천보다 더 의미 있을지도 모른다. 이번 주에 돌아오는 ‘채식의 날’에는 무엇을 먹을지 고민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