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
커피는 내게 오랫동안 ‘어른의 음료’였다. 초등학생 때, 엄마는 커피가 성장호르몬 분비를 방해하고 잠을 설치게 한다며 마시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어릴 땐 누구나 마음속에 청개구리 한 마리쯤 품고 있지 않았던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다. 더구나 한창 어른 흉내를 내고 싶어 안달이 난 11살짜리에게, 커피는 더욱 매력적인 존재였다.
엄마는 꼭 식후에 믹스커피를 한 잔씩 마시곤 했다. 항상 가스레인지 옆에 놓여 있는 찻주전자의 뻑뻑한 뚜껑이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수돗물을 틀어 주전자의 절반만큼 채우고, 버너 위에 올린다. 점화 스위치를 돌릴 땐 탁, 탁, 탁, 부싯돌로 불을 붙일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난다. 찬장에서 노란색 커피 스틱을 꺼내, 원두와 설탕이 잘 섞이도록 흔든다.
그때부터 나는 마치 간식 소리에 반응하는 강아지처럼 귀를 쫑긋거리고, 엉덩이를 들썩인다.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은 주전자에서 물이 다 끓었음을 알리는 휘잉- 소리가 들리고, 컵에 쪼르륵 물을 따르는 소리까지 나면 믹스커피의 향이 내 방까지 흘러 들어온다. 믹스커피의 향은 익숙하면서도 은근히 중독적인 데가 있다. 단순히 달콤하기만 했다면 금세 질렸을지도 모른다. 달콤하게 퍼졌다가 약간의 씁쓸함으로 끝나는 향은 반전매력으로 느껴져 호기심을 더욱 자극시킨다. ‘어른의 음료’가 더 어른스럽게 느껴지는 포인트다.
“엄마, 나 한 모금만.”
“안돼. 너 잠 못 자.”
1차 시도, 단칼에 거절당한다.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 채로 잠시 후퇴한다.
“엄마, 혹시 마시기 싫으면 나 남겨줘도 돼.”
직접 조르기가 먹히지 않으면 바로 전략을 수정한다. 전혀 질척거릴 생각이 없다는 양 쿨한 태도로 일관하는 게 이번 전략의 핵심이다. 수십 번의 거절을 오랜 시간 쌓아 온 덕에 알아낸 노하우다.
“참 나,”
엄마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다. 이 전략은 십중팔구는 아니어도, 십중삼사는 성공한다. 드디어 달디 단 한 모금을 얻어 마신다. 커피의 맛은 향이 찾아오는 순서와 반대다. 씁쓸한 맛이 먼저 혀에 닿고, 그다음 달달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찬다. 가끔은 묘하게 구수한 맛이 나기도 한다.
“쩝.”
한 모금은 1초면 끝난다. 그래서 더 감칠맛이 난다. 나는 입맛을 다신다. 아직 입 안에 남은 커피의 맛에 아쉬움만 더 커졌다. 똑같은 전략이 두 번 연속으로 성공하는 일은 없으니, 다음엔 다른 꾀를 내야 한다.
다음 날, 괜찮은 작전이 떠올랐다. 일명 ‘다신 들러붙지 않을게’ 작전. 온전한 한 잔을 마시게 해 주면, 그동안 커피에 맺힌 한이 풀려서 매번 커피를 마실 때마다 졸라대는 일이 없을 거라는 논리다.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혼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인생은 모 아니면 도 아니겠는가. 도전해 본다.
식사 후, 엄마가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린다. 엄마에게 슬며시 다가간다. 이제 래퍼가 될 시간이다.
“엄마, 내가 지금껏 한이 맺혔어. 왜? 커피를 맨날 개미 오줌만큼만 마시니까. 이건 마신 것도 아니고 안 마신 것도 아니야. 감칠맛이 나잖아. 차라리 한 잔을 다 마시게 해 주면, 한이 풀릴 것 같아. 그럼 조를 필요도 없고 엄마도 귀찮은 일 없고 일석이조지?”
엄마가 웃는다.
“그래, 한 잔 마셔. 대신 네가 타 마셔.”
“오? 웬일이야! 그쯤은 쉽지.”
마침 주전자의 물이 끓기 시작했다. 찬장에서 커피스틱과 가장 마음에 드는 유리잔을 꺼낸다. 커피스틱을 흔들어 원두와 설탕이 고루 섞이게 하고, 유리잔에 쏟아붓는다. 주전자를 들어 조심스럽게 물이 나오도록 기울인다.
믹스커피 맛의 변수는 오직 한 가지다. 물의 양에 따라 일명 ‘한강 커피’가 되기도 하고, 광고 모델의 대사처럼 ’아,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기도 한다.
‘무조건 양 많이, 가득, 가득!’
그때의 나는 그걸 몰랐다. ‘한강커피’를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고 간다. 어렵게 얻어 낸 소중한 순간을 향부터 음미한다.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고, 창 밖을 바라보며 커피가 식기를 기다린다. 여유로운 내 모습, 폼이 좀 나는 것 같다. 커피가 적당히 식었다. 천천히 잔을 들고 입으로 가져간다.
“엥? 이게 뭐야!”
이건 그냥 커피 향만 나는 강물이다. 사기꾼은 없는데 사기당한 기분이다. 욕심이 과했다. 엄마의 커피가 항상 아쉬운 이유가 있었다. 나는 커피를 한번 더 마셔보지만, 여전히 밍밍하다. 괜히 입안에서 굴려보다가 조용히 책상에 내려놓는다. 다음엔 그냥 엄마 거 한 모금만 슬쩍 마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