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의 밤은 유난히 깁니다. 로펌 어쏘(Associate) 시절, 새벽 2시 사무실 창밖으로 내려다보던 법원 검찰청의 불 꺼진 실루엣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당시 선배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농담처럼 말했습니다.
"야, 사내변(사내변호사) 가면 변호사 커리어는 끝나는 거야. 법정에 서는 변호사가 아니라, 결재판 들고 다니는 회사원 되러 가는 거잖아."
당시 사내변호사는 서초동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난 이들이 선택하는 '이류의 길' 쯤으로 치부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송무를 하지 않는 변호사는 '칼 없는 무사' 취급을 받았고, 기업이라는 거대 조직의 부속품이 되는 것은 일종의 패배이자 야성의 상실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불과 10년이 지난 지금, 풍경은 기묘하게 역전되었습니다. 대기업 법무팀 공고가 뜨면 내로라하는 로펌의 에이스들이 앞다퉈 지원서를 냅니다. 경쟁률 50대 1은 예사가 되었고, 이제 그 누구도 사내변호사를 '패배자'라 부르지 않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왜 그토록 열망하던 서초동의 야성을 버리고, 빌딩 숲의 안온함으로 숨어들게 되었을까요. 이 거대한 이동은 단순한 워라밸의 추구가 아닌, 변호사라는 직업의 생존 방식이 근본적으로 변화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입니다.
우리가 서초동을 떠나는 첫 번째 이유는 명백합니다. 그곳의 약속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과거 로펌의 살인적인 노동 강도를 견디게 했던 동력은 '미래의 보상'이었습니다. 몇 년만 버티면 파트너가 되고, 개업하여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암묵적인 사다리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은 냉혹하게 변했습니다. 변호사 수는 폭증했고, 수임료는 10년 전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뒷걸음질 쳤습니다. 이제 어쏘 변호사들은 깨닫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갈아 넣는 이 시간이 미래의 부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붉은 여왕의 달리기'처럼, 죽어라 달려야 겨우 제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서초동의 무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지쳐버렸습니다. 반면, 기업은 현실적인 대안을 내밀었습니다. 이제 사내변호사의 처우는 로펌의 턱밑까지 쫓아왔습니다. 무엇보다 주 52시간제가 만들어준 '저녁이 있는 삶'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로펌을 떠나 기업으로 향하는 변호사들의 내면에는 더 깊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영업(Sales)'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연차가 찰수록 변호사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법리가 아닌 '술자리'가 됩니다. 의뢰인의 비위를 맞추고, 주말 골프를 나가고, 끊임없이 사건을 물어와야 하는 영업맨의 삶. 그것은 우리가 고시촌에서 꿈꾸던 법조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사내변호사가 되는 순간, 이 구도는 완벽하게 역전됩니다. 회사가 곧 유일한 의뢰인이 됩니다. 나는 더 이상 밖으로 나가 사건을 구걸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부의 리스크를 관리하고, 비즈니스에 법률적 전략을 더하는 '전문가'로서의 본질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됩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야성이 거세되었다'고 비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의 전문성을 굽실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펼칠 수 있는 환경을 택하는 것, 그것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영리한 전략적 선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내변호사의 삶이 마냥 장밋빛 유토피아인 것은 아닙니다. 서초동을 떠나 빌딩 숲으로 들어온 우리는 곧바로 새로운 현실을 마주합니다.
기업은 자선 단체가 아닙니다. 그들이 로펌 수준의 연봉과 복지를 제공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법만 아는 샌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산업의 생리를 이해하고, 규제의 틈새를 찾아내어 비즈니스를 성공시킬 '해결사'를 원합니다.
그래서 진입 장벽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습니다. 이제는 변호사 자격증 하나만으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화려한 학벌, 유창한 외국어, 특정 산업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없이는 서류 심사라는 첫 번째 관문조차 통과하기 어렵습니다. 50대 1의 경쟁률은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안온함'을 얻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새로운 형태의 입장료입니다.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합니다. 변호사라는 자격증이 평생을 보장해 주는 갑옷이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서초동의 낡은 영광을 뒤로하고 기업으로 향하는 행렬은, 변화된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우리 세대의 처절하고도 합리적인 몸부림입니다.
당신이 지금 서초동의 새벽 불빛 아래서 고민하고 있다면, 혹은 기업의 높은 문턱 앞에서 좌절하고 있다면 기억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그곳에서 내가 어떤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느냐입니다. 사내변호사는 도피처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치열한 전장(戰場)일 뿐입니다.
이 글의 지면에 다 담지 못한, 전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현실적인 무기(Weapon)와 커리어 전략은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만 조심스럽게 나누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