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함이 무능이 되는 순간: 전문성의 역설

'무엇'을 벼릴 것인가보다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의 문제

Gemini_Generated_Image_a6zdb6a6zdb6a6zd.png


새벽 2시, 여의도의 빌딩 숲은 여전히 불야성입니다. 로펌 어소(Associate) 시절, 선배 변호사 K형과 나눴던 대화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합니다. 당시 그는 건설 부동산 분쟁(Construction Dispute)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스페셜리스트'였습니다. 관련 법리는 물론이고, 현장의 공사 공정표까지 줄줄 꿰고 있어 파트너 변호사들조차 그를 어려워할 정도였으니까요.


"변호사는 말이야, 송곳 같아야 해. 어디를 찔러도 들어갈 수 있게 아주 날카로워야 한다고."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부동산 호황기와 맞물려 그는 로펌 내 매출 1위를 다투는 '라이징 스타'였죠. 하지만 몇 년 뒤,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시장이 얼어붙고 건설사들이 줄도산 위기에 처하자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시장 자체가 쪼그라드니, 그토록 예리했던 그의 송곳도 뚫고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밤샘을 밥 먹듯 하며 갈고닦은 전문성이, 업황의 하락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것을 목격한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노력의 배신'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로펌을 나와 대기업을 거쳐 지금의 금융권으로 오기까지, 줄곧 하나의 화두를 붙들고 있습니다.


"과연 한 우물을 파는 것이 정답일까요?"



스페셜리스트의 함정: 레버리지의 양면성


우리는 흔히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되라고 배웁니다. 한 분야의 깊이 있는 전문성, 즉 스페셜리스트가 되는 것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산업이 팽창하는 시기, 스페셜리스트는 엄청난 '레버리지(Leverage) 효과'를 누립니다. 남들이 모르는 지식을 선점하고 있기에, 시장의 파이가 커지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몸값을 불릴 수 있습니다. 이때의 전문성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부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됩니다.


하지만 여기엔 치명적인 맹점이 있습니다. 레버리지는 올라갈 때만 작동하지 않습니다. 내려갈 때도 똑같이, 아니 더 가혹하게 작동합니다.


제가 몸담았던 로펌 업계에서도 특정 분야의 전문 변호사들이 해당 산업의 침체와 함께 순식간에 입지를 잃는 경우를 숱하게 보았습니다. 시장이 얼어붙으면 기업들은 지갑을 닫습니다. 자문료는 삭감되고, 프로젝트는 중단되죠. 이때 '너무 좁고 깊게' 파버린 전문성은 도리어 독이 됩니다. 다른 분야로 피보팅(Pivoting)하려 해도, 이미 굳어버린 커리어의 관성은 발목을 잡습니다. 유능했던 전문가가, 단지 시장이 변했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고비용 저효율' 인력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너럴리스트가 답일까요?


이런 공포 때문에 많은 분이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를 지향하기도 합니다. 이것저것 두루두루 할 줄 아는, 소위 '올라운더'가 되면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냉정하게 말씀드려, 전문직 시장에서 어설픈 제너럴리스트는 '무색무취'와 동의어입니다. 5년 차 변호사로서 확신하건대, 클라이언트는 '적당히 다 아는 변호사'에게 비싼 수임료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불하는 비용은 '나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대가, 즉 경제적 지대(Economic Rent)입니다.


제너럴리스트는 리스크를 분산할 수는 있어도, 폭발적인 업사이드(Upside)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대체할 수 있는 인력은 시장 논리에 의해 평균적인 대우, 혹은 그 이하로 수렴하게 되어 있습니다.


Gemini_Generated_Image_8ag1668ag1668ag1.png




결국 답은 '흐름 위에 올라탄 전문성'입니다


결론적으로 저는 여전히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전제가 하나 붙습니다. '성장하는 산업'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항해사라도 물이 다 빠져버린 갯벌 위에서는 배를 띄울 수 없습니다. 반면,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서는 평범한 서퍼도 파도의 힘을 빌려 높이 날아오릅니다. 개인의 역량(Skill)보다 더 강력한 변수는 그가 속한 산업(Industry)의 중력입니다.


제가 사내변호사로서 로펌을 떠나 대기업으로, 그리고 다시 자본이 가장 뜨겁게 흐르는 금융권으로 적을 옮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연봉을 쫓은 것이 아닙니다. 제 법률적 지식이 '비용 절감'이 아닌 '수익 창출'의 도구로 쓰일 수 있는 곳, 산업의 성장성이 저의 전문성을 증폭시켜 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닌 결과입니다.


진정한 전문가는 자신의 칼을 가는 데에만 몰두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땅이 비옥한 토지인지, 아니면 곧 가라앉을 늪인지를 먼저 살핍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칼도, 벨 것이 없는 곳에서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Gemini_Generated_Image_5csmzm5csmzm5csm.png


닫는 글


퇴근길,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빌딩을 봅니다. 저 안에는 과거의 저처럼, 혹은 K형처럼 자신의 분야에서 치열하게 실력을 갈고닦는 수많은 인재가 있을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감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탁월함은 지금, 순풍을 타고 있나요? 아니면 역풍을 거스르느라 소진되고 있나요? 만약 여러분이 충분히 노력했음에도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실력 탓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단지, 여러분이 서 있는 무대가 여러분의 가치를 담아내기에 너무 좁거나 낡았을 뿐입니다.


1등석 티켓을 끊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비행기가 목적지로 제대로 날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조금 더 영악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땀방울이 배신당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이 글에 담지 못한 구체적인 커리어 피보팅 전략과 산업 분석에 대한 이야기는, 저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만 조심스럽게 나누고 있습니다. "


https://kmong.com/gig/720256


keyword
작가의 이전글5년 차 변호사가 고백하는 '누더기 커리어'의 공포